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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바위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4. 26.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이것을 좀 더 설명해 줄 또 하나의 우화가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그대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고, 너무 잘 보여 항상 명확히 자각이 되며, 부드럽고, 편재하며 그리고 영원한 그런 거대한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그 내부에서는 무구한 연꽃이 곷을 피웁니다. 그 꽃잎들은 이따금 서로 부딪치기도 하고, 이따금 서로 부딪치지 않기도 합니다. 이따금 그것들은 볼 수 있도록 밖으로 노출되기도 하고, 이따금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기도 합니다. 어떤 꽃잎들은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있으며, 어떤 것들은 위로 쳐들고 있습니다. 또 어떤 연곷의 뿌리는 서로 뒤얽혀 있으며, 어떤 것은 아예 뿌리가 없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비록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 라마여! 이 바위가 진실로 우주 의식입니다. 그것은 그 동질성에 있어서 바위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내부에는 이 우주의 이 모든 다양한 생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사람이 그 바위 내부에 있는 여러 가지 다른 형상들을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것과 꼭 같이, 이 우주도 또한 이 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어리석게도 상상합니다. 조각가가 바위로 여러 가지 다른 형상들을 '창조'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바위입니다. 동질의 의식 덩어리인 이 우주 의식의 경우에서도 꼭 그와 같습니다. 견고한 바위 안에는 그것을 쪼아 조각할 수 있는 다양한 조각상들이 잠재되어 있는 것과 꼭 같이, 이 우주에 있는 다양한 이름들과 형상들을 가진 생물들도 우주 의식 안에 잠재적으로 존재합니다. 바위가 조각되었든 조각되지 않았든 간에 여전히 바위인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도 이 세상이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간에 여전히 의식인 것입니다. 현상계는 단지 공허한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실재는 다름 아닌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나타나고 변화되는 것마저도 비록 나타나거나 변화된다는 점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단지 브람만 즉 우주 의식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이러한 구분(변화의 의미에서나 혹은 다른 어떤 의미에서의 변화)도 브람만 내에서는 무의미합니다. 이러한 표현이 브람만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 그 의미는 마치 신기루에 나타난 물처럼 아주 다른 것입니다. 씨앗은 씨앗 이외의 어떤 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꽃이나 열매도 씨앗과 꼭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씨앗의 실체는 또한 그 후에 나타난 결과물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그와 꼭 같이 동질의 우주 의식의 덩어리는 의식이란 그 본질 이외의 어떤 것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으면 이원성이 사라집니다. 의식은 결코 무(無)의식이 되지 않습니다. 약간의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든,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브람만입니다. 이 모든 것은 동질의 의식 덩어리 속에서 잠재적인 상태로 영원히 존재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른바 이 우주(사실은 똑같은 의식의 또 다른 양상인) 안에 있는 시간과 공간과 기타 요인들은 다름 아닌 의식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생각들과 개념들에 불과하고, 쪼 참나는 하나이며 분할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이것들이 어떻게 비실재적인 것으로 간주되겠습니까? 씨앗 속에는 씨앗 이외의 어떤 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양성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추측컨데 씨앗 속에 존재하는 (꽃이나 열매 등의) 잠재적인 다양성에 대한 개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와 곡 같이 우주 의식도 다양성이 전혀 없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다양성의 우주가 개념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말해집니다.

둘은 한 개입니다. 오직 그 단 하나의 돌과 관련해서만 수많은 연꽃들의 개념이 일어납니다. 그와 같이 다양성의 개념은 다양성을 일으킴이 없이 의식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마치 신기루에 있는 물이 존재하기도 하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기도 하듯이, 무한한 의식과 관련된 다양성도 그와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진실로 무한한 의식인 브람만입니다. 돌 속에 연꽃들이 존재한다는 개념이 그 돌을 파괴하지 않는 것처럼, 브람만도 브람만 안에 있는 브람만의 본성 자체로서 존재하는 현상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습니다. 진실로 브람만과 세상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동의어입니다. 사람이 실재를 이런 식으로 보면, 브람만만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수소와 산소의 기체에 불과한 것처럼, 현상계도 다름 아닌 오직 브람만입니다. 마치 공작새의 다채로운 깃털과 날개가 공작새의 알 속에 현존해 있는 것처럼, 하나의 의식은 마음이나 산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 같은 힘이나 능력은 무한한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다양한 대상들로서 그 무엇이 보여진다 하더라도, 지혜의 눈을 가지고 그것을 본다면, 오직 브람만이나 무한한 의식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작새 안의 유동체에서 다양성의 개념이 나오는 것처럼, 표면상 다양한 것처럼 보이지만 비이원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브람만과 세상이라는 개념은 이원적인 동시에 비이원적입니다. 일원성이나 다양성과 같은 이 모든 개념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그것이 바로 궁극의 상태입니다.

무한한 의식은 전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는 그 무한한 의식 속에 존재합니다. 그 관계는 마치 공작새의 다양한 부분들이 하나의 알이란 실체 속에 있는 있는 것처럼, 다양성과 비다양성의 관계입니다. 이 모든 것 속에 다양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자아감이나 공간 등과 같은 이 모든 것은 비록 그것들이 전혀 창조된 것은 아니지만, 참된 실체의 본성을 획득했습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창조되지) 않은 곳에서 모든 것이 보입니다. 그와 꼭 같이 현자들과 신들과 완전한 이들은 초월적 의식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들 자신의 본성이 주는 희열을 맛봅니다. 그들은 관찰자와 대상이란 이원성의 환영과 그 후에 일어나는 생각의 움직임들을 다 버렸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고정되어 깜빡거리지 않습니다.

이 현자들은 여기에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가공의 존재에 대한 생각은 전혀 품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는 자와 알려진 대상(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완전히 버린 상태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력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그려진 그림자처럼 보입니다. 즉, 그들의 마음은 그려진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개념화시키는 의식의 경향성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꼭 신이 하는 것처럼 의식 속에서 약간의 생각을 움직임으로써 적절한 활동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움직이고, 관찰자와 대상이 접촉하는 경험을 가지는 것이 그들에게는 또한 큰 기쁨을 자아닙니다. 그들의 의식은 모든 이미지(관념과 개념)들을 깨끗이 버렸기 때문에 정말로 순수합니다.

이러한 참나의 순수한 상태, 즉 무한한 의식의 참된 본성은 비전(마음과 감각들의 경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쉽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멀거나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만 성취됩니다.

그것만이 존재하지,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몸도 존재하지 않고, 또한 감각들과 생명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도 존재하지 않고, 또한 기억이나 잠재적인 경향성들의 창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식도 존재하지 않고, 세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재적인 것도 아니고, 비실재적인 것도 아니며, 그 사이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공도 아니요, 공 아님도 아닙니다. 시간도 아니며, 공간도 아니며,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전혀 없는 상태로 가슴 속에 있는 백 개의 장막에서 벗어날 때, 사람은 보이는 모든 것 속에서 참나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시작도 아니요, 끝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에나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으로 여겨집니다. 수천 명이 태어나고, 수천 명이 죽습니다. 그러나 안이나 바깥이나 어디에도 존재하는 참나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것과는 약간의 차이만 나는 듯이, 이 모든 몸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밝은 표정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더라도, '나'라는 것과 '나의 것'이라는 것조차 전혀 없는 상태로 계십시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특징과 특성이 없는 브람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원하고, 평화로우며, 순수하고 그리고 아주 고요한 것입니다.

라마는, 만약 브람만이 어떠한 변화도 받지 않는다면, 실재하기도 하며 실재하지도 않는 이 현상계가 그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냐고 물었다.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 라마여! 참된 변화란 우유가 응고되어 두 번 다시 우유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응유가 되는 것처럼, 한 물질이 다른 물질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현상계 이전에도 전혀 변화가 없었고, 현상계 이후에도 그 무변화의 상태를 다시 찾는 브람만과는 다릅니다. 시작과 끝 모두에서 그것은 변화하지 않는 동질의 의식입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이고 분명한 변화는 전혀 변화가 아닌, 의식의 가벼운 동요에 불과합니다. 그 브람만 안에서는 의식의 주체나 대상이 전혀 없습니다. 시작과 끝에 어떤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브람만일 뿐입니다. 만약 중간에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현상은 비실재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므로 참나는 시작과 끝에도, 따라서 중간에도 역시 참나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변형이나 변경도 받지 않습니다.

라마는, 순수한 의식인 그 참나 안에서 이 가벼운 의식의 동요가 어떻게 일어나는냐고 다시 물었다.

바시슈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 라마여! 내가 확신하기로 그 무한한 의식만이 실재하며, 그 본성에 있어서는 전혀 동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브람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와 둘의 개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의사 전달이나 가르침을 위함일 뿐입니다. 그대와 나와 이 모든 것은 순수한 브람만입니다. 따라서 무지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라마는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그러나 당신은 앞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에게 이 무지의 본성을 탐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때에는 그대가 아직 완전히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무지'나 '지바' 등과 같은 표현들은 깨어 있지 못한 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구도자에게 진리의 지식을 전하기 전에 그를 일깨워 줄 상식과 적절한 보조 수단(육띠는 또한 보통 '속임수'를 의미한다)을 사용해야 합니다. 만약 깨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이 브람만이다."라고 공언하면, 그것은 마치 나무보고 자기의 고통을 덜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깨어 있지 않은 자가 깨어나게 되는 것은 바로 적절한 보조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써 가능합니다. 깨어 있는 자는 진리에 의해 깨달음을 얻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대가 깨어 있기 때문에 나는 그대에게 진리를 말합니다.

그대는 브람만입니다. 나도 브람만이고, 우주 전체도 브람만입니다. 그대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언제나 이 진리를 깨달으십시오. 이 브람만 즉 참나만이 모든 존재의 실재입니다. 이는 마치 점토가 수천 개의 도자기의 참된 실체인 것과 꼭 같습니다. 바람과 그 움직임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닌 것과 꼭 같이, 이 모든 현상을 일으키는 의식과 그 내적인 움직임(에너지)도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다양성을 분명히 불러일으키는 것도 바로 의식의 토양에 떨어진 생각의 씨앗인 것입니다. 만약 그 씨앗이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다면, 마음의 싹도 트지 않습니다.

라마는 말했다.

사람은 알 수 있는 것을 알고, 볼 수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 모두는 진실로 당신이 전해 준 그 감미로운 브람만의 지혜 덕분에 궁극의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충만함은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충만함은 충만함에서 태어났고, 충만함은 충만함을 채웁니다. 충만함은 항상 충만함 속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의 보다 큰 확장을 위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부디 참고 들어 주십시오. 감각 기관들은 분명히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감각 기관들을 통해 대상을 경험했지만, 죽고 나서는 어떻게 해서 감각들을 경험하지 못합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순수 의식과 따로 떨어져서는 어떤 감각도, 어떤 마음도, 심지어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연 속에서는 대상들로서, 사람에게서는 감각들로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그 의식뿐입니다. 그 의식이 분명히 미묘한 몸(뿌르야스따까)이 되었을 때, 그것은 외부의 대상을 반영하게 됩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의식은 진실로 모든 변화들을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의식 속에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을 지바라고 합니다. 이 몸 안에서 살아가고 움직이는 것은 바로 그 지바입니다. '나'라는 생각이 일어날 때(아함바바나), 그것을 자아감(아함까라)이라고 합니다. 여러 생각(마나나)이 있을 때, 그것을 마음(마나스)이라고 합니다. 자각(붓다)에 의해 보여질(드르슈) 때, 그것을 감각(인드리야)이라고 합니다. 몸이라는 생각이 충만하면, 그것은 몸으로 나타납니다. 대상이라는 생각이 충만하면, 그것은 다양한 대상들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지속되면, 미묘한 성격은 물질적인 실체로 응축됩니다. 그 후부터 똑같은 의식이 '나는 몸이다.', '나는 나무다.' 등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스스로 기만당한 채, 그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것은 순수한 탄생을 얻고, 영적으로 깨어나게 됩니다. 그 다음 그것은 진리에 헌신함으로써 참나 지식에 도달합니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 그것이 어떻게 대상들을 지각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이미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 때문에 의식이 몸 안에서 지바로서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그 감각들이 그 자체 바깥의 비슷한 몸에 다가가면, 그 둘 사이에는 접촉이 있고, 또 그들을 알고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접촉이 있을 때, 대상은 자기 자신의 내부에 반영이 되고, 지바는 비록 그 반영이 바깥에 있다고 믿지만 이 반영을 지각하게 됩니다. 지바는 오직 이 반영만을 압니다. 이것은 지바가 그 자체를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접촉이 외부 대상들을 지각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해방된 현인의 경우가 아니라, 마음이 현혹된 무지한 사람들의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물론, '생각'에 지나지 않는 지바와 그 나머지 모든 것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지각력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보여지고 경험되는 반영은 사실상 시각적 환영 내지 지적인 왜곡입니다. 참나는 항상 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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