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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icism/카발라

비전의 카발라 - 12장. 성요한의 에소테릭 교회

by Yuneelif 2017. 7. 25.

제12장

 

성 요한의 에소테릭 교회

 

 

예수는 카발라에 정통했다. 이 과학은 유대 전승의 총체였다. 예수는 유대 전승 속에서 성장했다. 성 요한에게 카발라를 계시한 것은 다름 아닌 예수였다. 이것이 우리가 요한 계시록 속에서 그토록 많은 카발라적 요소들을 발견하게 되는 이유이다. 모든 영적인 전승들 속에는 현교적인 가르침과 비교秘敎적인 가르침이 존재한다. 전자는 모든 신도들한테 주어지고 후자는 소수의 입문자들한테만 계시된다.

 

기독교의 현교적인 측면은 성 베드로에 의해 상징되고 비교적인 측면은 성 요한에 의해 상징된다. 복음서에서 성 요한은 “예수가 사랑했던 제자”로 불린다. 그와 예수의 친밀성은 때때로 다른 제자들 특히 베드로의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부활 후 베드로는 예수한테 요한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예수가 대답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는 남아 있을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말이 형제들 사이에 전해지고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일컬어졌다.”

 

이것은 오랫동안 살아있는 전승의 원천이다. 이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아직도 살아 있으며 아가르타에서 자신을 드러낼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며 다른 비전가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프레스터 요한의 신비로운 왕국에 대한 오랜 전설 역시 예수의 이 말과 요한의 불사설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므로 예수는 두 개의 상이한 미션을 위해 요한과 베드로를 준비했다. 어째서 그는 자신의 일을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었을까? 과거 비전의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자들은 모든 위대한 마스터들이 동일한 것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모세는 대중들을 위한 한 체계의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나 무리 중에서 가장 지혜롭고 신실한 70명의 장로들에게는 자신의 오경에 대한 열쇠를 맡겼다. 이 열쇠들 덕분에 모세 오경의 감추어진 의미를 해독할 수 있다. 특정한 진리들이 비밀로 남겨졌다.

 

나약한 자들의 이해의 범위를 초월하기 때문이거나 사악한 자의 손에 힘이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예수가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한 이유이다. 대중들한테 비유로 말하는 이유를 제자들이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다. “왜냐하면 하늘 왕국의 신비를 아는 것이 너희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기성 교회들은 구교든 신교든 현교적인 교회이다. 그들은 특정한 진리들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계율과 대중에 대한 지배이다. 그들은 지극히 심오한 신비의 진리를 계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준비된 자들만이 내밀한 속성을 지닌 실재를 받을 수 있고 소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현교적인 가르침을 베드로에게 주었고 비교적인 가르침을 요한한테 주었다. 요한은 구약, 특히 신비로운 창세기의 열쇠들을 받았다. 여러분 모두 요한 복음서의 서두 구문을 잘 알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느니라.” 이 문장은 창세기의 첫 구절의 메아리로 보인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나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카발라에 정통했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복음서들 중 하나에서 그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은 간통하다 잡혀온 여인에 대한 에피소드를 기억하는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통하다가 잡힌 여인을 예수 앞에 데려왔다.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그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돼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그들에게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해야할지 말하길 원했다. 그들은 그가 율법을 깨뜨리기를 바랬다.

 

복음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앉아서 손가락으로 땅바닥 위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그들이 계속 예수한테 말하자 그가 일어나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그녀한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그는 앉아서 땅바닥 위에 썼다.‘ 이제까지 아무도 예수가 땅바닥 위에 무엇을 쓰고 있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그가 할 일이 없어서 흙바닥에 낙서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들의 질문을 회피하기 위해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 했던 것일까? 물론 둘 다 아니다. 처음으로, 예수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당신한테 말하겠다. 그는 특정한 카발라 사인과 심벌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들에 대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와 동일한 전통에서 공부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들한테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이다.

 

”만일 너희들이 순수하고 흠이 없다면 율법을 적용해서 여자를 벌주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동일한 죄를 지고 있다면 주의하라. 이 카발라 사인들에 의해 너희는 벌을 받아 쓰러질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바닥에 그린 심벌들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와 여자만 남겨두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가 그들을 그런 식으로 위협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쉽게 자신들의 뜻을 굽힐 리 있었을까?

 

예수가 카발라에 정통해 있었다는 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한 계시록은 카발라 없이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가증스러움과 음탕함이 가득 찬 금 대접을 쥔 음녀가 타고 있는 일곱 개의 머리와 열개의 뿔 달린 짐승에 대한 구절이 있다. 이것은 분명 악에 대한 언급이다. 이것은 카발라에서 말하는 세피로트의 반대 개념인 클리포트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계시록의 내밀한 의미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지니지 못한 자들이 어떻게 그것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길 기대하겠는가?

 

예를 들어서 요한은 짐승의 숫자가 666이라고 썼다. 관련된 상징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에 언급된 짐승 666이 누구인지 밝히려고 노력해왔다. 이 가엾은 숫자에 대해 상상 가능한 모든 해석들이 붙여져 왔다. 그리고 그 숫자는 역사상 가장 못된 독재자들한테 부여되곤 했다.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등등. 웃기는 일이다.

 

 

기독교는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수 개의 상이한 전통의 소산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 전통이다. 이 유대 전통은 카발라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발라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이다.

 

기독교는 광대한 철학과 풍부한 과학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백 년동안 교회는 불완전한 단편, 피상적인 정보들만을 신도들한테 전달하는데 만족하고 있다.

 

그들이 영감을 위해 일본, 티벳, 힌두, 수피 철학 등을 모으고 있는 것이 의아해 보이지 않는가? 다른 철학들이 그토록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음에 비해 볼 때 신도들이 기독교로부터 받은 답들은 너무도 빈약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성직자는 기독교의 깊은 진리를 신도들과 교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은 특별한 가르침은 주지 않고 설교하는데 만족한다. 지금은 기독교가 이런 것들에 대해 반성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는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나는 기독교에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로 돌아오기를 희망한다. 그들은 사실상 아무런 개념이 없다. 만일 성직자들이 나의 태도를 이해한다면 그들은 맨 먼저 달려와서 나를 얼싸안을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이다. 그들은 내가 그리스도에 반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커다란 오해가 있다.

 

봉팽, 197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