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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icism/카발라

비전의 카발라 - 11장. 살아 있는 로고스 I (알파벳과 로고스의 22요소)

by Yuneelif 2017. 7. 23.

제11장

 

살아있는 로고스

 

I

알파벳과 로고스의 22 요소

 

 

요한은 계시록을 22장으로 나누었다. 그것은 히브리 알파벳의 숫자와 같다. 이것을 통해 요한은 계시록이 로고스, 신성한 말씀에 봉헌된 것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그는 요한복음서에서 말씀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 말씀, 그것의 본성, 그것의 힘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가?

 

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이라.”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 알파벳의 첫째와 마지막 문자이다. 신약이 그리스어로 씌어졌다. 예수가 본래 말한 히브리어에서 첫 번째와 마지막 알파벳은 알레프와 타우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니라”의 정확한 의미는 이것이다. “나는 알레프와 타우이다.”

 

알파와 오메가 또는 알레프와 타우, 이 두 문자는 전체 알파벳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시작은 끝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알파벳은 일련의 문자들로 구성된 하나의 전체이다. 알파벳의 순서는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들은 창조의 문자들의 비유적 상징이다. 히브리 알파벳의 문자들은 요소, 힘, 덕목, 특성, 영 등을 나타낸다. 신은 그것들을 결합하여 우주를 창조하였다. 이 살아있는 문자들을 통해 신은 단어와 구절을 구성했다.

 

그리고 신은 오늘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이 세계가 창조된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이 창조가 계속 진행되는 방식이다. 비전가가 히브리 문자의 카발라적 의미를 공부할 때 그는 자연의 살아 있는 언어를 읽고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히브리 알파벳은 22문자로 구성돼 있다. 그리스도가 ‘나는 알파요 오메가니라.’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이런 말이다. ‘나는 로고스이다. 나는 세계를 창조한 22요소이다.’ 인간은 또한 알파벳의 문자를 사용한다. 생각하고, 말하고, 쓰기 위해. 이렇게 할 때 그는 신이 행한 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로고스의 물질적 표현)을 통해 사고하고, 말하고, 글을 쓰더라도 그것은 항상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내면에 모든 요소들을 소유하고 있다. 컬러, 힘, 광선, 진동 등은 모두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고 표현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은 로고스의 세 가지 표현 방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로고스를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로고스를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로고스를 쓴다. 고대의 비전가들은 이 세 가지 로고스의 표현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로부터 종교 건물에 기하학적 도형이나 상형문자 등의 형태로 로고스를 표현했다. 이 형상들은 수세기 동안 살아남아 왔다. 그로 보건데 고대인들은 미래의 인류로 하여금 신성한 로고스와 접촉하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발라 알파벳의 모든 문자들은 우주를 감싸는 하나의 네트워크 속에 서로 연결돼 있다.그리고 그것들을 결합하여 구절이나 시를 만드는 법을 아는 자는 진정한 문인이다. 말씀에 대한 비전적 관점에서 문인은 언어의 요소들, 알파벳의 문자들을 그의 삶의 모든 영역, 특히 그 자신의 내적 존재 속에 바꾸어 놓는 법을 배운 자이다. 그는 그것들을 결합시켜 아름답고 조화로운 말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토록 어려운 것은 정확히 이것이다. 우리의 내적 생명이 무질서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말씀이 무질서 속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들을 온통 뒤죽박죽 만들어 버린다.

 

각 문자가 자연의 기하학적 형상과 상응한다는 것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러므로 모든 기하학적 형상 이면에 특별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자신의 형상들을 각각 상징하는 문자들과 링크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각 문자와 상응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을 아는 자는 우주의 흐름을 조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정한 형상을 만들거나 그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응하는 존재들과 접촉하고 있는 것이다. 비전가가 힘과 형상과 문자 사이의 상응관계에 대해 배우고 그것들을 조종하는 법을 알려고 할 때 그것은 천상과의 연대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알레프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알레프의 형상은 두 팔로 각기 하늘과 땅을 가리키고 있는 인간과 닮았다. 이 자세는 천상과 지상 사이의 매개자를 묘사한 것이다. 들어 올린 한쪽 팔로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받고 아래로 내린 다른 팔로는 그것을 인류에게 쏟아부어준다. 반대로 그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취해 자기 내면에서 변형시킨 뒤 그것을 다시 빛의 형태로 하늘로 올려 보낸다. 알레프는 '아는 자'이자 '할 수 있는 자'이다.

 

문자 알레프는 활동의 시작을 나타낸다. 인간이 팔을 들어 올리면 그것은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신호이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다. 인간의 두 팔이 활공하는 새의 날개처럼 수평으로 펼쳐져 있어 팔과 몸이 십자가를 형성할 때 그것은 균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두 팔이 다른 각도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균형의 상태가 아니다. 달리 말해 그는 활동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타로의 첫 번째 카드인 마법사 카드를 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테이블 앞에 한 남자가 한 팔은 위로, 한 팔은 아래로 한 채 서 있다. 달리 말해 그는 운동 상태에 있다. 그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위로 올린 팔로 그는 천상과 접촉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진 팔로 지상과, 인간들과 접촉하고 있다. 그가 하늘로부터 받는 힘은 그를 통과해서 지상으로 전달되고 있다. 그는 알레프이다. 그러나 알레프가 된다는 것은 또한 지상의 힘을 받아 그것들을 천상을 향해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매개자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카발리스트에게 있어서 알레프는 완벽한 인간이다. 왜냐하면 그는 천상과 밀접하게 접촉해 있는 동시에 인류를 위해 활동적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레프는 또한 용해와 응고, 두 작용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아데프트한테 희석과 농축 등 물질에 작용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문자 알레프가 네 개의 요드(י)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이다. 요드는 굽힌 엄지손가락의 형상이다. 이는 그것이 의지와 관련돼 있다는 의미이다. 알레프는 매우 강력하고 창조적인 문자이다. 그 형상은 극성이 네 개의 의지, 네 개의 활동, 네 방향이 조합된 의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알레프는 동서남북 네 방향을 지닌 공간의 문자, 사원소의 문자이다. 타로 카드 속에서 우리는 마법사가 테이블 앞에 서 있는 것을 본다. 테이블은 흙 원소의 심벌이다. 테이블 위에는 컵이 있다. 컵은 물 원소의 심벌이다. 마법사는 손으로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있다. 이것은 그가 아래의 원소(물과 흙)와 위의 원소(공기와 불)를 서로 연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가 쓰고 있는 모자는 아주 특이한 형태이다. 모자 테두리의 형상이 수평 8, 즉 무한대 기호의 꼴이다. 그러므로 문자 알레프는 자연의 힘, 사대의 힘을 지배하는 능력을 지닌 비전가를 상징한다.

 

그러면 이제 숫자들의 순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4를 1(영과 의지)에 복종시킨 자는 5가 된다. 5는 사랑, 지혜, 진리, 친절, 정의, 이 다섯 가지 덕목을 지닌 완전한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6이 되었을 때에만 완벽한 균형을 성취했다고 말해질 수 있다. 6은 3의 두 배, 물질과 영의 두 삼각형, 솔로몬의 표장이다. 우리가 이 두 삼각형 사이의 완벽한 내적 균형을 이루었을 때 우리는 솔로몬의 표장이 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고 말한 요한은 확실히 신으로부터의 첫 소생, 만물의 시작인 문자 알레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로고스는 그리스도, 우주적 마법사이다. 그는 만물을 구성하는 사대를 가지고 작업한다. “나의 아버지께서 항상 일하고 계시니 나 역시 일하노라.”라고 예수가 말했을 때 예수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그는 자신의 활동이 결코 그치지 않는다는 개념을 강조하길 원했다. 이제 당신은 그리스도의 심벌인 십자가 역시 신의 부단한 활동에 대한 이 관념과 관련되어 있음을 이해할 것이다. 십자가의 수평선이 기울어지면 그것은 활동하는 양상이 된다. 이것은 또한 인도와 그리스 등의 많은 종교에서 발견되는 심벌인 스와스티카의 의미이다.

 

알레프는 수평선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십자가이다. 활동을 위해 완벽한 균형에서 벗어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같은 크기의 네 가지가 직각으로 서로 교차하고 있다. 이것은 남성원리와 여성원리의 절대적 균형을 상징한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다른 형태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앙크 십자가는 우주의 모든 문들을 열수 있는 열쇠를 의미한다. 이 열쇠는 인간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에 대해 모른다면 우주의 문을 열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는 단지 인간을 무한 차원으로 확장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자 알레프는 많은 다른 상징적 형태 속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십자가를 들고 있는 어린 양, 화살에 관통된 뱀 등. 양자는 알레프의 상징이자 동시에 인간의 상징이다. 척추와 두개골은 뱀과 다소 유사하다. 그리고 뱀을 관통하고 있는 화살은 운동과 작용의 방향을 나타내는데 이는 알레프의 측면 가지인 두 팔에 의해 상징된다. 그리스도, 로고스는 살아 있는 십자가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쥐고 있는 이 어린양의 형상은 무엇인가?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린양은 희생, 사랑이다. 태초에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어린양이 자신을 희생하여 세계가 탄생하도록 하였다. 원자와 분자들을 결합하기 위해서는 결합력이 필요하다. 그 결합력은 바로 사랑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어린 양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세계를 결합하는 이 동일한 힘은 생명의 모든 측면에서 발견된다. 분자와 모든 화학 물질들이 존재하는 것은 이 힘 덕분이다. 그리고 또한 모든 인간 공동체, 가족, 사회, 국가들이 존속하는 것 역시 이 힘 덕분이다. 희생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전체는 오로지 그 각 부분의 희생 덕분에 존재할 수 있다. 수많은 형태의 희생 - 표정, 말, 상호간의 배려와 도움, 포기 등 -이 없으면 모든 것은 분해되고 무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만일 어떤 것이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그리스도 위에, 사랑 위에 기초를 두도록 해야만 한다.

 

내가 알레프에 대해 방금 말한 것으로부터 도출되는 실천적인 결론은 작동시키고자 하는 힘을 알기 전에는 어떤 종류의 행동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필수적인 것은 시작이다. 힘들이나 사건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매우 쉽다. 그러나 그것들을 계속 통제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조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만일 정치적인 세계와 관련된 남자와 여자들이 이 법칙에 보다 의식意識적이라면 그들은 특정한 변화를 결정하기에 앞서 스스로 성찰에 더 많은 시간을 줄 것이다.

 

자신들이 사물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혁명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창조한 것에 의해 파괴되는 것으로 종국을 맞이하게 된다. ‘주술사의 도제’라는 용어는 신중치 못하게 에너지를 움직였다가 방향 감각을 잃고 통제하지 못하게 된 사람과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물질계에서든, 아스트랄계에서든, 멘탈계에서든 당신의 힘은 행위의 중간에도 끝에도 있지 않고 시작에 있다. 당신자신이 산꼭대기에 있다고 염상하라. 당신 곁에, 절벽가장자리에 거대한 바위가 균형을 잡은 채 서있다. 당신은 손을 뻗어 밀기만 하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바위가 움직일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선택은 당신한테 달려 있다. 거기 그냥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든가 아니면 산비탈 아래로 굴리든가. 당신이 바위를 슬쩍 밀기만 하면 굴러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이다.

 

그 이후부터 당신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그것은 막대한 피해를 초래할 것이다. 당신은 그걸 막을 힘이 없다. 이와 유사하게 만일 당신이 당신의 분노를 느끼자마자 즉시 통제한다면 그것은 폭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한 번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돼 버릴 것이다. 당신이 매달리고 있는 관념들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종국에 가서는 머리속에 박힌 관념을 뿌리 뽑을 수 없게 돼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매우 신중하게 깨어 있으라. 결코 있지 말라, 타우는 알레프에 의존하고 있음을. 끝은 시작에 달려 있다. 자신이 의도하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정확히 시작하는 법을 알고 마법 의식을 행하는 마법사처럼 되라.

 

 

“나는 알레프요 타우이다.”라고 그리스도가 말했을 때 그는 우리에게 행동을 시작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시작은 천상, 신성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과 더불어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물질 속으로 움직여 내려와야 한다. 만일 당신이 물질과 더불어 시작하여 천상으로 올라가려고 노력한다면 당신은 실패와 고통을 맞보게 될 것이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서로 육체적으로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영적으로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의 남녀들은 종종 그 정반대로 행하곤 한다. 그들은 타우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알레프를 맨 나중에 둔다. 그러나 모든 것이 멀어져 갈 때 그들은 영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 속에서 당신은 시작해야만 할 것을 앞머리에 두고 먼저 시작하라.

 

히브리 알파벳을 배운 카발리스트들은 알파벳을 구분한다. 먼저 삼모자, 알레프, 멤, 쉰. 이 삼모자는 각각 공기, 물, 불을 창조했다. 다음은 칠복자, 베트, 기멜, 달레트, 카프, 페, 레쉬, 타우. 이 칠복자는 일곱 행성을 창조했다. 마지막으로 12단자, 헤, 바우, 자인, 헤트, 테트, 요드, 라메드, 눈, 사메크, 아인, 차데, 코프. 12단자는 황도대의 12궁을 창조했다. 그러므로 히브리 알파벳의 22문자는 창조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물론 당신은 이 문자들이 단순히 추상적 원리에 대한 물질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당신이 말하거나 쓰는 행위를 할 때 당신은 신이 행한 것을 하는 것이다. 당신은 문자와 단어를 결합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사용해서 창조 행위를 한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기쁨, 진리, 사랑, 빛을 타인 속에 창조할 수 있다. 또는 당신은 슬픔, 어둠, 질병, 실망 등을 창조할 수 있다.

 

두 번째 예에서 당신은 진정한 작문도 진정한 대화도 창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졸작이고 횡설수설에 불과하다. 진정한 진화는 신성한 결과를 얻기 위해 대화, 작문, 이미지들을 이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로고스의 요소들을 작동시켜 선, 미, 정의를 창조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이렇게 하는 자는 신의 작업에 참여하는 자이다. 어느 날 그는 신의 포도원에 일꾼으로 고용될 것이다.

 

창조의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창조주는 의식적으로 작업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모래와 회반죽을 나를 일꾼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당신은 말할 것이다. “그것이 전부인가?” 그렇다. 모욕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신은 확실히 가장 중요한 일에 우리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사소할 지라도 이 신성한 작업에 참여를 허락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신이 당신한테 준 생명을 살펴보라. 마치 당신이 주님 자신을 보는 것처럼 그것의 모든 현현들에 대해 명상하라. 그리고 말하라. “이제부터 저는 오로지 다른 피조물들을 생동감 넘치게 하고, 위로하고, 계명하고, 따스하게 하고, 격려하고, 강하게 하는 관점에서만 말하고 행동하겠습니다.” 당장에 당신이 이 결정을 하는 것만으로 로고스는 당신 안에서 그의 벽감壁龕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점점 더 분명하게 당신이, 신이 주신 많은 요소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아직 그것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서서히 당신은 그 요소들이 당신한테 복종하기 시작하는 것을, 그리고 당신이 매우 강력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켜야할 유일한 것은, 당신이 선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완전히 성취할 때까지 그것들을 따르고 실천에 옮겨야만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당신이 내뱉는 말들은 진실로 진정한 진리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당신한테 내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 내가 17세였을 때였다. 나는 볼 때마다 나를 조화와 평화로 가득 채울 형상, 기하학적 도형을 발견할 필요를 느꼈다.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나는 원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나서 동일한 반경을 사용하여 원주상에 동일한 거리로 여섯 개의 원을 그렸다. 그러자 장미꽃 문양이 나왔다. 나는 여섯 개의 원에 스펙트럼상의 여섯 색깔을 칠했다. 보라색, 푸른색, 녹색, 노란색, 오렌지색, 붉은색.

 

이 심벌을 명상하자 나의 의식은 황홀경의 상태로 고양되었다. 내게 있어서 이것은 완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궁리하다가 어떤 신비한 충동에 의해 나는 요한 복음서의 첫 구절을 장미 문양 아래 적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왜 이 말일까? 내가 이것과 어떤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확신했다. 아무튼 나는 평생 동안 이 구절에 대해 생각해왔다. 지금 나는 안다, 어째서 내가 그 심벌에다 그 구절을 쓰게 되었는지.

 

성 요한은 자연의 힘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로고스의 신비를 계시했다. 그것은 그의 가르침이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그 가르침에 등을 돌리고 목사나 신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주의 모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로고스의 비의를 잊어버렸다. 당신은 요한이 교회들에 보낸 서한 속에 적힌 그리스도의 약속을 기억하는가?

 

“이기는 그에게 나는 감추어둔 만나를 주겠노라. 그리고 나는 그에게 흰돌을 줄 것이다. 그 돌 위에 받는 자 외에는 모를 새로운 이름을 적을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 나는 하나님의 천국 한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줄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 흰 옷을 입힐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 하나님 신전의 기둥을 삼을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 나의 옥좌에 함께 앉게 할 것이다.“

 

이 모든 약속들은 말씀의 비의 속으로 들어가는 비전이다.

 

세브레 1958.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