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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icism/카발라

비전의 카발라 - 11장. 살아있는 로고스 III (로고스의 힘)

by Yuneelif 2017. 7. 25.

III

로고스의 힘

 

 

인간들은 전체적으로 호의적이다! 인간들은 항상 자신의 동료들을 돕기를 매우 갈망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인간들은 동료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말은 두 개의 날을 가진 칼이다. 계명시키고, 도와주고, 자유롭게 하고, 달래줄 수 있는 반면 속이고 상처주고 구속하고 파괴시킬 수도 있다. 계시록에서 성 요한은 위대한 존재 멜기세덱에 대한 자신의 환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거기서 그는 멜기세덱의 입에서 나오는 양날이 선 날카로운 검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멜기세덱이 선의 영을 풀어놓고 악의 영을 구속할 수 있는 전능한 로고스를 소유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 말은 제자들에게 로고스의 동일한 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법의 '말씀'은 묶고 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들은 더 이상 이 힘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지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하고 또 말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왜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비판이나 비난을 통해 마침내 누군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을 때 그들은 선포한다. “나는 그를 위해 말했을 뿐이다. 난 그저 솔직했을 뿐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성마름과 분노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 쪽이 더 진실할 것이다. 이렇게 말한 후에야 자신들의 행동의 정당성을 옹호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유독 화가 났을 때만 솔직해지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사람들이 자신들이 한 말을 정당화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럴듯한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가 진정으로 영적이고 공평무사하지 않는한, 그들의 말들은 결코 다른 이들에게 유익한 효과를 주지 못할 것이다.

 

오랜 옛적부터 비전가들은 말의 힘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축복이 아직도 종교 의식에 주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이다. 미사의 과정에서 수차례 사제는 신도들을 축복한다. 그리고 당신은 아마도 텔레비전에서 교황이 세계 각처의 방문지에서 또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자기 주위에 운집한 군중에게 축복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특별히 장엄한 행사의 경우 그는 로마 시와 세계에 축복을 내린다.

 

그러한 축복은 실제로 어떤 효과가 있을까? 그것은 누가 그것을 주고, 누가 받느냐에 달려 있다. 축복이란 좋은 말을 하여 안녕을 수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축복은 백마술의 행위이다. 물론 그렇기 위해서는 축복을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순수하고 공평무사해야하고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한편, 축복을 받는 사람은 최소한 그 축복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개선할 열망을 지니고 있고 선의를 위해 일해야 한다.

 

만일 이런 조건들이 아니라면 축복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인간들이 그것들의 의미를 인식하게 될 것이고, 당신의 축복들이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과 몸짓으로 축복을 계속 하는 것이 좋다.

 

내가 인도에 있었을 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힘을 아직도 믿고 있는 걸 보고서 무척 놀랐다. 그 나라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종종 길거리에서 남녀의 무리가 자신들을 축복해 달라고 내게 부탁하곤 했다. 나는 무척이나 놀랐고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큰 호텔의 소유주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축복을 부탁했다. 유럽에서 우리는 그런 경의의 표현 방식에 익숙지 않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의 축복을 비는 몇 가지 경우들에 대해 읽었다. 사람들은 예수의 말 한마디로 치유되고 악령을 물리치고 죽음에서 살아났다. 말의 힘에 대한 그들의 신뢰란! 그러나 나는 반복한다. 힘을 가지기 위해서 말들은 우리의 통제 하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말들을 여기저기 남발한다. 적절치 못한 말 한마디로 얼마나 많은 우정이 파괴되고 가정불화가 생기는가? 말 한마디로 우정을 만들 수도 있고 말 한마디로 우정을 깰 수도 있고 평생 원수를 만들 수도 있다. 우리의 혀를 지키기가 사실상 얼마나 어려운가?

 

말의 힘을 아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말들을 하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악한 영들이 그것들을 물질적인 받침틀로 이용해 조만간 악한 계획을 꾸민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말에 주의하라. 왜냐하면 설령 당신이 어떤 해악을 의도하지 않았다 할 지라도 악한 존재들은 당신의 부정적인 말을 이용하여 실제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른 존재들을 탓할 수 없다. 악의 구실을 제공하는 것은 당신한테 달려 있는 문제이다.

 

저주하는 습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나라들이 있다. 사소한 구실로 그들은 부모, 자식, 이웃, 친구들을 저주한다. 이것은 아주 나쁜 습관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들은 재앙을 위한 완벽한 조건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또한 누군가에 대해 부정적인 말로 대화를 끝내지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당신이 한 끝말을 통해 계속 부정적인 반향을 만드는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비판해야만 한다면 그의 결점을 말하는 것으로 말을 마치지 말라. 이 법칙에 의하면 당신 말의 악한 효과가 그에게 영향을 미치기 전에 당신 자신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말로 대화를 마치도록 하라. 예를 들어서 “물론 그에게는 좋은 점도 있지.”라고 얘기 한 후 그것들을 언급한 다음 말을 마쳐라!

 

사람들은 이 정묘한 세부 사항들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무척 중요하다. 그것들은 모두 위대한 삶의 법칙의 일부분이다. 만일 당신이 해야 할 보다 중요한 다른 것을 가졌다는 구실로 그 법칙들을 존중하는데 실패한다면 그 다른 것들로부터 당신이 얻은 것은 먼지로 화하게 될 것이고 당신이 이미 소유했던 귀중한 것들 -건강, 평화, 아름다움 - 은 당신을 저버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말하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생각한다, 만일 자신들이 진실이 아닌 무엇인가를 말하거나 한다면 사과하면 그 뿐이라고. 얼마나 잘못돼 있는가! 나는 이미 당신에게 마호멧에 대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한 젊은이가 이웃에 대해 험담을 한 뒤 마호멧한테 찾아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잘못을 수정할 수 있을지 물었다.

 

그러자 마호멧이 말했다. “깃털 몇 뭉치를 가지고 가서 거리에 있는 모든 집의 앞에 하나씩 놓아라.“ 그 젊은이는 그가 시킨대로 한 후 다음날 다시 찾아가 말했다. ”당신이 말한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마호멧이 말했다. ”이제 다시 가서 내가 놓아두었던 깃털들을 다시 가지고 오너라.“ 마호멧이 시키는대로 간 젊은이는 이번에는 아주 시무룩한 상태로 돌아왔다. ”모든 곳을 돌아다녔어요. 하지만 깃털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모두 바람에 날려가 버렸어요.“

 

”그렇다.“ 마호멧이 말했다. ”너의 말도 그와 같다. 일단 그것들이 너의 입에서 날아가 버리면 너는 그것들을 되돌릴 수 없다.“

 

말이 어디로 흘러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해를 끼칠지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비록 당신이 그 해害를 다시 거두어들이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란 지난하다. 왜냐하면 당신의 말은 다른 사람들한테 묻혀버렸고 해악이 발생한 장소를 정확히 찾아 파악한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에 대해 사죄하거나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야기된 피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당신 자신을 속이지 말라.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스트랄과 우주 법칙의 눈으로 볼 때 당신은 방면되기에 충분치 않다.

 

또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만일 당신이 약속을 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우리는 온갖 약속들을 남발하는 많은 좋은 말들을 듣는다. 약속하는 데는 돈이 드는 게 아니다. 자연히 실천보다는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쉬운 길을 선택한다. 사람들이 일단 어떤 것을 약속한다면 그들은 그것에 대해 쉽게 느낄 수 있다.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는데 왜 걱정하는가! 글쎄,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비전학에 따르면 약속은 서명, 서약, 계약이다. 당신의 말들은 에테르계에 기록된다. 그리고 거기에 씌어진 대로 묶이게 된다.

 

약속 상대를 제외하고 누구도 당신을 약속으로부터 풀어줄 수 없다. 만일 그 사람이 공평무사하고 이해심이 있고 사랑에 넘친 사람이라면 그는 당신을 풀어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이 말한 대로 실천해야만 할 것이다. 당신은 말할 것이다. “아니오. 나는 재치를 발휘할 거에요. 그의 머리 꼭대기에 있어요. 신께 나를 풀어달라고 부탁할게요.” 그러나 신조차 당신을 풀어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만든 법칙을 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조차 감히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

 

당신은 말할 것이다. “어떻게 신조차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가? 그는 전지전능하지 않는가?” 그는 전지전능하다. 그러나 흔히 종교에서 말하는 식의 의미는 아니다. 신은 변덕스럽지 않다. 갑자기 생각난다고 해서 이미 정해둔 것과 바로 모순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살 세계를 창조했고 법칙을 만들어 지키고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의 법이다. 바로 여기에 신의 위대함이 존재한다. 그는 변덕스럽게 우주의 법칙을 이랬다저랬다 바꾸지 않는다. 그의 창조가 미치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러나 자신의 창조 안에서 행동할 때 그는 자신이 만든 법칙을 준수한다.

 

이것이 바로 신조차 당신을 당신의 약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수 없는 이유이다. 당신이 어떤 것을 약속하기 전에 지킬 수 있는 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당신의 의무이다. 당신은 결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무슨 차이가 있을라구? 난 약속을 잘 지킬 수 있겠지. 어떤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지 않다. 정확히 반대로 그것이 정확히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물질계에서 당신이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당신한테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말은 정묘한 세계에도 계속 존재한다. 문서상에가 아니라 필름 상에. 당신과 당신의 말이 담긴 사운드 트랙이 있는 필름상에. 신성한 정의는 누가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증명하기 위해 종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필름과 마그네틱테이프 상에 기록된다. 만일 이런 원리가 이미 자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간이 사진과 영화를 발명할 수 있었겠는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진화의 정도를 판단하고 당신 자신을 알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좋은 참고의 틀은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당신 자신을 분석해 보라. 그리고 당신이 무심코 말하는 것을 살펴보라. 당신의 말이 조리가 없고 과장되고 이기적이고 악의적인지 살펴보라. 당신 자신을 분석해보고 당신의 혀를 잘 간직하라. 어떤 것을 말하기 전에 당신이 왜 그것을 말하기를 원하는 지 물어보라. 누군가를 계명시키고 자유롭게 하고 치유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한테 원한을 사고 누군가를 오도하고 모욕감을 주기 위한 것인가?

 

이런 식으로 당신의 저급한 본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인가? 만일 이런 경우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사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말을 덜 하는 것이 낫다. 사람들의 말이 진화의 사다리의 낮은 단계에 묶어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여기 형제단에서 우리는 많은 시간을 기도와 명상과 강의에 투자한다. 이 모든 것들은 당신한테 심원한 진리를 일별할 수 있도록, 그리고 당신의 가슴을 사랑과 빛으로 충만케 하도록, 삶의 의미를 보다 명징하게 볼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온갖 종류의 사소한 가십을 떠벌리다가 방을 나선다. 당신이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부분에 대해 보다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라. 다른 형제자매들과 같이 있을 때 건설적이고 교훈적인 주제들에 대해 말하도록 하라. 그래서 헤어질 때 각자 타인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하라. “그들이 한 모든 선한 말들에 대해 축복하라. 그들이 한 말들은 나에게 용기와 긍정적인 인생관을 주었다. 그들의 말은 빛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굳은 마음을 내게 주었다.” 말은 씨앗이다. 씨앗은 싹이 튼다. 그리고 꽃과 열매를 맺거나 해로운 가시와 독풀을 낳기도 한다.

 

인간은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말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 이 능력 덕분에 문명과 문화가 번성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말을 보존할 필요를 느낄 때 쓰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말 덕분에 인간은 전능하다. 진정한 마법은 지성적이고 조화롭고 양식 있고 음악적이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흘러나온 말이다. 그리스도는 로고스, 신의 말씀이다.

 

카발라의 세피로트 나무에서 로고스는 두 번째 세피라 호크마이다. 호크마는 케테르로부터 나온 지혜이다. 호크마는 신이 우주를 창조한 모든 원소, 숫자, 문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호크마는 그리스도의 영역이다. 영원한 영광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영광이고 신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가 “나는 세계의 빛이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그리스도, 로고스는 생명의 50문을 여는 우주적인 열쇠이다.

 

자신의 말을 강력하고 조화롭게 말하는 자는 이미 이 열쇠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열쇠는 그에게 모든 문들을 열어주어 기적적인 일들을 행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다. 우선 자기 자신 안에서, 그 다음 타인과 전체 자연 안에서. 말씀을 통해 물질에 작용을 가하는 힘, 이것은 인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된 놀라운 미래이다.

 

 

만일 어머니들이 말씀의 힘을 안다면 자녀들에게 특별한 특성과 덕성을 계발시키는 데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기가 말을 이해하기에 이른 나이에도 어머니는 아기한테 말하고 지극한 소망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어머니는 아기를 품에 안고 사랑과 확신으로 그에 대한 그녀의 꿈을 속삭일 수 있을 것이다. 아기는 당연히 어머니의 그 말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말은 형상을 창조한다는 점이다. 말은 형상을 만들고 응고시켜 현실화 시킨다. 아기의 잠재의식 속에는 어머니의 말들을 듣고 기록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 힘들은 나머지 생 동안 계속 아기한테 영향을 미친다. 그것들은 아기의 뇌, 심장, 모든 조직, 모든 세포 속 에 잠재된 온갖 가능성의 방아쇠를 당겨 어느 날 엄마가 아기에 대해 꿈꾸었던 덕성들이 현현하게 된다.

 

어째서 이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봉팽에는 어린 올리브와 아몬드 나무가 몇 그루 있다. 그것들을 심을 때 나는 그것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는 그 나무들이 나의 말을 들었다고 당신한테 확신시킬 수 있다. 당신은 가서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얼마나 특별한 나무로 자랐는지. 그들이 맺은 올리브와 아몬드는 풍성하다! 저번 날 나는 멕시코에 있는 어떤 농부 공동체에 대한 텔레비전 프로를 보았다.

 

농부들은 자기들이 심는 채소한테 말을 하였다. 그 결과 그것들은 매우 맛있을 뿐 만 아니라 아주 크고 예뻤다. 그 농부들은 비전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히 말의 힘에 의해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수세기 전 과거 현자들의 지혜를 보존하고 있었다. 이렇듯 식물한테도 가능한 것이다! 식물한테는 뇌도 신경체계도 없다. 그들은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읽을 수도 없다. 그들은 학교에 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들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에 대해서는 어떻겠는가?

 

그리스도만이 로고스는 아니다. 당신 역시 로고스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만일 당신한테 그리스도와 같은 동일한 본성, 에센스가 없다면 어떻게 그가 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 자신이 말하였다. “내가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들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제자의 이상이 신성한 로고스를 보다 더 가까이 닮는 이유이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로고스를 순화시키고 더욱 강하게 하고 보다 생생하게 하고 보다 조화롭게 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데 있어서 첫 번째 규칙은 완전히 의식적이 되어 자신을 컨트롤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말하라. “온갖 종류의 말들이 내 입에서 새나가지 않도록 하겠다. 자기 통제를 하여 내 안의 로고스가 효과적이고 건설적이고 신성하게 하겠다.”

 

이런 식으로 어느 날 당신은 자연의 영들한테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이 당신의 말들을 지키는 기술을 계발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을 때 그리고 당신이 말이란 신성한 에너지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들은 당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것이고 당신의 소망을 들어줄 것이다.

 

당신은 알아야만 한다, 당신이 여기서 받는 지식이 없다면 당신은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혼들의 심판들 앞에 가게 되었을 때 당신은 그들이 당신한테 말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말하라.” 그러면 당신은 올바른 선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유창하게 말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심판들은 당신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알고 있다, 말로는 거짓이 가능하다는 걸. 그들이 듣는 것은 당신 목소리의 진동과 공명이다.

 

그것은 당신 목소리의 진실이다. 그것은 당신이 그들한테 진실을 말하고 있는 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당신은 당신 목소리의 진정성에 의해 판단될 것이다. 나는 반복한다. 한 사람이 최고 심판들 앞에 나아갔을 때 그들은 말할 것이다. “말하라.” 그러면 앞으로 나서며 그는 말해야만 한다. “영원의 형상들이여, 보소서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심판하기 위해 더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말의 힘은 말 속에 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진동 속에도 존재한다. 비의에서는 말의 마법을 알 권리를 가지지 못했거나 그것들을 정확히 발성할 수 없는 사람들한테는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봉팽, 1962.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