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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icism/카발라

비전의 카발라 - 11장. 살아있는 로고스 II (로고스의 우주언어)

by Yuneelif 2017. 7. 24.

II

로고스의 우주언어

 

 

나는 당신이 침묵의 기간의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 더 많이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빛과 사랑의 씨앗을 뿌림으로써 이 침묵기를 살아있게 해야만 한다. 침묵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음습한 침묵이라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 차이를 인식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만일 이 모임에 올 때마다 당신이 어떤 영적인 사역을 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다면 당신은 언젠가 우리가 창조한 분위기가 천사들을 끌어당겨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단언할 수 있다. 천사들은 와서 우리 사이에 거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들의 향기, 음악, 컬러 등을 흩뿌려줄 것이다. 그날이 오면 당신은 내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여는 것에 대해 조급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침묵과 비견될 만한 말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말은 극히 제한적이다. 거의 대부분의 언어는 평범한 인간들에 의해 일상의 평범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오, 철학자나 신비가들에게 합당한 약간의 말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천상적 실재나 영적 감각을 표현하기 원할 때 종종 우리가 차라리 침묵을 택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 때문이다. 우리는 몸짓, 눈짓, 심지어 침묵으로도 우리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다.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그것은 말이 효과가 없다는 의미인가요?” 결코 그렇지 않다! 만일 우리의 말이 로고스와 부합한다면, 생생하게 약동한다면, 영의 생명으로 잉태돼 있다면 그것은 침묵만큼이나 강력하다. 로고스는 영의 세계에 속한다. 로고스는 상념이다. 단순히 생각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은 신성한 말씀, 로고스가 우주를 창조한 방식이다.

 

로고스는 아직 물질계에 도달하지 않은 말씀이다. 그것은 존재한다. 그것은 살아있는 실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표현되지 않았다. 당신이 생각할 때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 침묵의 말이 로고스이다. 그것은 신비스럽게도 효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물질계에 닿아 말이 되면 로고스는 효능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신만이 당신이 당신 자신을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하는 지, 그리고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기 때문이다.

 

말하기 전에 당신은 하나의 사고를 공식화한다. 그것이 로고스이다. 그러고 나서 당신은 당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말들을 선택한다. 그것이 언어이다. 당신이 말할 때 모두가 그 말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만이 이해한다. 그러나 사고의 차원에서는 자연의 전체가 당신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모든 피조물에 공통적인 우주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당신과 동일한 언어로 말하지 않더라도 민감하고 수용적인 사람들은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한다. 그들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고도로 진보된 그리고 지극히 예민한 존재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생각이 공식화되자마자 바로 그 상념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빛의 영들, 천사들은 상호간의 의사소통이나 인간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실제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말처럼 인식된다.

 

로고스는 당신의 내적인 생명의 직접적인 발출이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시不可視의 세계 속에서 컬러, 형상, 공명 등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한편 말은 물질계 상에서 특정한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그것은 오직 같은 나라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일어나는 문제들이란! 그러나 당신이 자신의 온 가슴과 혼으로 내적으로 말할 때 식물과 새들, 동물들, 벌레들, 심지어 별들도 당신을 이해할 것이다. 가슴과 혼의 언어는 자연에서 보편적으로 이해되어지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주 언어는 로고스이다. 말은 항상 오해를 낳는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올바른 단어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사실 그들은 종종 자신이 무엇을 말할지 조차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실상 말이 로고스에 의해 잉태되고 혼과 영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생명력에 넘치고 강력해질 수 있다. 이것이, 인간들이 언젠가 더 이상 서로 단어로 말하지 않고 빛, 컬러, 소리로 의사소통할 때가 오는 이유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즉시 서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고통 받고 있는 자에게 가까이 있으면 당신은 말 없이도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또 기쁨에 벅찬 사람 곁에 있으면 당신은 그 기쁨 역시 느낄 수 있다. 고통과 기쁨은 말 없이 이해될 수 있는 언어이다. 그것들은 속일 수 없는 언어이다.

 

로고스는 인간의 내적 생명의 모든 표현의 종합이다. 로고스는 인간의 상념과 감정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방사물의 표현의 종합이다. 이런 관점에서 로고스가 개인의 말과 정확히 반대된다고 말하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신의 이웃을 싫어하고 그에게 해를 끼치기 원한다면 먼저 상대방의 의혹을 가라앉히는 일에 착수할 것이다. 그리고 마치 우정처럼 그럴듯하게 완전히 속여 넘길 것이다. 말은 종종 불신, 증오, 반란 등 화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반응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된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정신병의사를 만나러 갔다. “의사 선생님” 그녀가 말했다. “저는 정상이 아닌 거 같아 두려워요. 요즘 내 친구들한테 내 진짜 나이와 몸무게를 말하고 있지 뭐예요.” 때로 진실을 얘기하는 것이 비정상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정상적인 대화 방식은 실제보다 더 그럴듯하게 가공하거나 축소시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들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물론 당신은 이런 경우들에서조차 말은 사실을 변형시키는 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맞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을 변형시키는 진정한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말이 효과가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말라. 말은 효과가 있다. 상념은 고급한 차원에서 사물을 창조한다. 그러나 말은 힘의 특정한 라인에 질료 입자들이 달라붙게 함으로써 물질화 시킨다. 이것이, 말이 물질계에 상념과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것을 성취할 수 있기 전에 당신이 알아야만 하는 법칙이 존재한다. 하나의 이미지를 사용해 보자. 당신이 사용하는 말은 총의 총신이고 당신의 상념이나 욕망은 화약이다.

 

만일 당신이 총신에 화약을 장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목표를 향해 방아쇠를 힘껏 당겨봐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반대로 만일 당신의 총에 총신이 없다면 당신은 총알을 넣을 수도, 겨눌 수도 없을 것이다. 총신은 당신의 총알에 방향을 준다. 그리고 화약은 그것에 힘, 반동력을 준다. 그러므로 먼저 당신은 강력한 상념과 감정을 가져야만 한다. 둘째로 당신은 말을 통해 욕망하는 방향으로 그것들을 조준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의 힘에 대한 얘기를 듣고, 아무런 감정의 투입도 없이 잠꼬대를 하듯 말 몇 마디 중얼거리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영은 항상 존재해야만 하고 활짝 깨어 있어야만 한다. 그랬을 때 당신은 사물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것들을 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른 이들도 당신이 말하는 것이 생생하게 실감나게 느낄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 심지어 심령주의자들조차 하나의 영적인 텍스트를 암송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진정한 상념이나 감정을 자신이 하는 말 속에 투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주님의 말씀의 해석자 또는 주님의 메신저라고 생각한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식으로 수많은 강연에서 끝도 없이 열변을 토한다. 반대로 주님이 우리에게 말할 때 그분은 지극히 단순하게 말한다. 그의 말씀은 번쩍이는 섬광처럼 너무도 농축돼 있어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온 생애가 걸려도 충분하지 않을 정도이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 말하거나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말에 사랑과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사이킥 에너지와 말은 결합되어야만 한다. 양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주의하라. 만일 당신이 너무 많은 화약을 모은다면 폭발하여 화상을 입을 우려가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가? 단순히 이런 의미이다. 기도하거나 명상할 때 당신은 아스트랄계와 멘탈계에 에너지를 생성시킨다.

 

 

그리고 이 에너지들은 출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실패하게 되면 폭발이 일어난다. 힘과 긴장의 과도한 축적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말은 이 힘들에 옷 입힐 수단을 줄 수 있다. 다시 말해 물질계에 현현하고 작용하는 수단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축적된 사이킥 에너지에 출구를 주는데 실패하면 그것은 폭발하여 당신을 파괴할 것이다. 당신의 내면에 축적된 에너지를 투사하고 그것에 목표를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당신은 말을 통해 할 수 있다.

 

제자는 상념으로 불가시不可視 세계의 모든 빛나는 존재들과 교감하고 그들을 초대해야만 한다. 이렇게 짧은 공식으로 말을 맺으면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법칙들에 대한 지식은 당신에게 지극히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의 영적인 삶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다. 비록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 동일한 법칙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그들은 입맞춤하고 잠을 잔다. 거기에 시적인 요소가 없다. 그들의 상념이나 욕망 속에는 숭고함의 요소가 없다. 결과가 미미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화약을 재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진정한 사랑, 부드러움, 시 등을 갈고 고양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하늘을 이 땅으로 당겨 와야 한다. 오로지 이렇게 했을 때만이 그들은 물질계에서 천상을 경험할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이 너무 서두른다는 점이다.

 

비전가가 침묵 속에서 명상할 때 그는 자신의 배터리를 재충전시킨다. 그리고 내면에 힘을 축적한다. 그가 말할 때 그의 말들은 잉태돼 있고 살아 있다. 말하기 전에 우리는 반듯이 단어들을 사랑과 신성한 힘으로 채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물의 기원과 원천, 유일한 진정한 힘은 로고스이기 때문이다. 말은 나중에 나온다. 무엇보다 먼저 당신은 생각하고 느낀다. 그것이 로고스이다.

 

두 번째로 당신은 당신의 생각에 옷을 입힐 한 형태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형상이 말이다. 주어진 언어로 당신이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당신이 단어와 언어를 구사하는 기술에 따라 당신 자신을 적절히 표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러나 로고스는 항상 즉각적으로 적절한 표현을 발견한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 심지어 천

사와 대천사들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사이에서의 교감을 위해서 나는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만일 당신이, 내가 물질계 차원에서 당신한테 하는 말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은 매우 빈약하고 심지어 비효과적일 수 있다. 특히 내가 때때로 당신과 떨어져 있고 당신한테 말할 수 있기까지 긴 기간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로고스의 차원 상에서 나는 끊임없이 당신에게 말하고 있다. 내가 집에 홀로 있을 때나 산 속에 있을 때 또는 여행하고 있을 때 나는 당신한테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것을 받는 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오직 물질적인 말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우리가 함께 있을 때 여기서 실천하기를 시작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침묵이 평소보다 좀 더 오래 지속될 때 조급하게 굴지 말고 당신의 안테나를 계발하는 법을 배우라. 당신의 스승이 당신에 대해 그리고 당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라.

 

그가 당신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을 어떤 미래로 이끌려고 하는지 생각해보려고 노력하라. 그가 물질계 상에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걸 말로 표현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말을 모독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생각을 오로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만 말하는 이유이다. 그 세계에서는 민감한 수용력을 지닌 자는 그것들을 받을 수 있다.

 

사실 때로 당신에게 노래를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물질계 상에서 좋은 목소리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노래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불가리아에서 나는 친구들과 릴라 산 위로 캠핑을 가곤 했다. 밤에 우리는 함께 은신처에서 잠을 잤다. 때때로 아침에 친구들이 내게 말하곤 했다, 내가 잠자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그들은 내가 부르는 노래의 단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노래들은 고대의 것으로 느껴졌다. 또한 목소리도 나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강력했고 무척 낭랑했다. 그들은 그 목소리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는 그 노래들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잠 속에서 부른 노래를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요즘도 나는 그러고 있을 것이다. 내 곁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신이 말씀을 통해, 다시 말해 로고스를 통해 만물을 창조했다. 단순한 말을 통해 만든 것이 아니다. 말은 공기가 없으면 안 된다. 태초에는 공기가 없었다. 신이 아직 공기를 만들기 전이다.

 

성 요한은 그리스어로 복음서를 썼다. 그리스어로 로고스라는 단어는 ‘말’과 ‘지성’ 양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말과 같은 것이 아니다. 말은 로고스로부터 나온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념의 표현, 현현이기 때문이다. 로고스가 원인이라면 말은 결과이다. 때로 결과는 완전하지 않을 수 있다!

 

말은 물질계 상에서 로고스의 현현이다. 로고스는 실행되기를 기다리는 계획이다. 그것은 말, 몸짓, 표정 등의 형태로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청사진으로 정의될 수 있다. 말의 언어뿐만 아니라 몸짓과 표정의 언어 또한 존재한다.

 

물질계에서 말은 필요불가결하다. 말은 로고스의 반영이기 때문에 활동적이다. 행위가 말을 기다리지 않는 생활의 분야는 없다. 말이 철수되면 행위는 정지된다. 말이 주어지면 행위가 시작된다. 죄수가 처형되거나 사면된다. 군대가 전쟁터로 파견되거나 휴전이 선포된다. 동료들로부터 진실을 입증받기도 하고 외면당하기도 한다. 말은 선과 악 양면에서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로고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군가한테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를 죽일 수 있다. 말의 힘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유일한 문제는 말은 거짓이 가능하지만 로고스는 거짓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어느 날 한 이웃이 물라 나수르딘에게 나귀를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럴 수 없어요.” 물라가 말했다. “나는 이미 그를 누구누구한테 빌려줬어요.” 그 순간 마굿간에서 나귀가 시끄럽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런!” 이웃이 말했다. “당신 거짓말하고 있군요. 당신은 나귀를 아무한테도 빌려주지 않았어요. 나귀가 마굿간에 있어요.” “뭐라고요?” 물라가 성가신 듯 대꾸했다. “당신, 내 말을 믿을 거요 나귀를 믿을 거요?”

 

미래에 인간들은 로고스의 힘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후두의 가능성을 계발함으로써 그 힘을 얻으려고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그것은 기본적으로 성적인 에너지의 통제에 대한 문제이다. 성적인 에너지들을 낭비하지 말고 그것들을 위로 끌어올린다면 인간은 인후를 생생히 활동하게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 물론 오랜 시간 훈련한 후에 - 인간은 말로써 활동할 수 있다. 인간의 말이 로고스, 창조의 말씀과 하나가 될 것이다. 태아 속에서 인후의 성장은 성기관의 발전과 관련된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두 개의 원리, 남성원리와 여성원리를 사용한다. 양자는 우리 입에서 입술과 혀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식기관은 남성 아니면 여성이다. 이 차원에서 각 인간은 오로지 하나의 원리만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보충 원리를 반대 성의 사람에게서 발견해야만 한다. 이것이 인간들이 전능하지 못한 이유이다.

 

인간들의 창조력은 둘로 분열돼 있다. 그러나 미래에 이 힘은 인후를 향해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인후가 두 원리를 결합하는 기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면 인간은 다시 한 번 전능해지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인간의 말은 로고스와의 조율을 위해 노력하느라 여전히 더듬고 감정 선을 타게 된다.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불완전이다. 인간에 관한 한, 말의 힘은 이미 상당하다. 당신은 유죄판결을 내릴 수도 있고 방면할 수도 있다. 위로할 수도 절망감을 줄 수도 있다. 잘 이끌 수도 있고 오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말에는 한계가 있다. 바위, 식물, 동물, 자연의 영들에 대해 그것은 전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나 미래에 인간이 인후의 양대 원리의 전능성을 계발하는 데 성공하면 인간은 자연의 힘들에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신처럼 진정한 창조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먼 과거에 인간들은 진정한 창조력을 소유했던 적이 있었다. 극북인과 레무리아인들은 양성일체적 존재였다. 때문에 그들은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향연>>에서 플라톤은 이 종족들이 제우스의 권위에 반항하다가 그 벌로 두 개의 성으로 나뉘게 되었다고 한다. 아틀란티스인들은 양성일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조들의 힘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었고 그 힘들을 남용한 대가로 벌을 받았다.

 

눈이나 귀, 코를 사용하기 전에 신생아는 입을 사용해서 울고 빤다. 시력과 청력을 이미 잃은 노인도 입을 계속 사용해서 먹고 중얼거린다. 우리는 모두 먹고 마시고 말하고 노래한다. 그러나 누구도 진정으로 입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입의 활동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이 활동은 진화의 절정에 이르는 방향으로 작업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을 취할 수 있다.

 

남성원리와 여성원리의 최고 최선의 아름다운 결합의 현현은 노래이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함께 부르는 노래. 높이 치솟는 여성의 목소리와 아래로 내리 깔리는 남성의 목소리는 물질과 영의 운동을 상징한다. 물질은 영과의 합일을 위해 상승하고 영은 물질과의 합일을 위해 하강한다.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가 결합된 노래보다 더한 기적, 심오한 교환은 없다. 진정한 합일은 낮은 차원이 아니라 높은 차원에서 발생한다.

 

만일 남성과 여성이 반대 성의 교환관계에 대한 필요를 가진다면 로고스의 합일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교환관계들은 결코 그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교환은 삶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변화시켜야만 하는 유일한 것은 이 관계의 질이다. 노래는 합일의 이상적인 형태이다. 눈 또한 교환의 수단으로서, 두 존재의 합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보다 정묘한 차원으로는 상념과 감정도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비전과학에 따르면 인간의 생식기관은 쇠퇴되고 결국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한다. 먼저 남자의 생식기관이 나중에는 여자의 생식기관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여성 기관은 자연 속에서 처음 나타났다. 그러나 가장 나중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더 이상 성적인 기관을 통해 아이들을 창조하지 않게 될 때 그들은 인후를 통해 그러한 창조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 확실히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멀고 먼 시일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날이 다가오면 아기를 가지길 원하는 커플은 보다 높은 영역에서 아기를 창조할 것이다.

 

로고스의 힘에 의해 미래의 아기한테 질료로 옷을 입히고 이 질료는 육체가 될 것이다. 그것은 교령회의 영매에 의해 만들어지는 엑토플라즘처럼 재흡수되는 위험은 없을 것이다. 교령회에서 불려나온 영들은 통신하기 위해 물질체를 필요로 한다. 이 체를 위한 물질은 일반적으로 영매로부터 빌려오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형성된 체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것은 빌려온 입자들이 영매에 의해 재흡수 됨에 따라 점차 분해된다.

 

목소리, 인후 등 로고스에 대한 이 전체 문제는 광대하다. 충분한 이해를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그 무엇보다 이해해야만 할 것은 인간은 우선 자신에 대한 완벽한 지배력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야 인간은 인후를 창조력의 센터로 만들 수 있길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세브레, 1971.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