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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백 명의 루드라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4. 26.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이와 관련하여 그대에게 한 전설을 이야기할 것이니, 부디 경청하여 주십시오.

옛날에 명상에 헌신했던 탁발 수도승이 한 명 살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그러한 명상에 의해 정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마음의 생각들을 그체화시키는 힘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계속적인 명상으로 피곤했지만 그의 마음이 완전히 집중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어떤 것을 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일자무식하며, 브람마나 계급이 아닌 가문의 사람으로 태어날 것을 상상했습니다. 말하자면, 즉시 그는 그 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는 '나는 지바타이다.'라는 느낌이 일어났습니다. 이 꿈의 존재는 역시 꿈의 대상들로 만들어진 도시에서 얼마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술에 취해 잠을 잤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전의 지식을 갖춘 브람마나가 된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동안, 어느 날 이 브람마나는 자신이 막강한 왕이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최고의 영광을 안은 강력한 황제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왕에게 어울리는 쾌락을 즐겼고, 그 후에 잠을 자면서 천상의 요정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요정도 어느 날 자신이 사슴이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슴은 자신이 덩굴식물이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확실히 동물도 꿈을 봅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보았거나 들었던 것을 회상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마음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사슴은 덩굴식물이 되었습니다. 그 덩굴식물 속에 있는 내면의 지성은 그 자신의 가슴속에서 벌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것은 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벌은 덩굴식물에 피어 있는 꽃의 넥타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벌은 그 꽃들 중의 하나에 있는 넥타에 애착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벌에게 확실한 파멸의 길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밤에 코끼리가 이 덩굴식물에게 다가와서, 벌과 함께 그것을 뜯어 입 안에서 짓이겼습니다. 그러나 벌은 이미 코끼리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코끼리를 생각했고, 그래서 코끼리가 되었습니다. 그 코끼리는 왕에게 잡혔습니다. 어느 날 그것은 벌집을 보았고, 그리고 그 자신의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그것은 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야생 덩굴식물에 피어 있는 꽃들의 넥타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덩굴식물이 되었습니다. 그 덩굴식물은 코끼리에 의해 파멸되었지만, 그 덩굴식물이 근처의 호수에서 백조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백조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백조는 다른 많은 백조 무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탁발 수도승이 이 백조를 명상하고 있을 때, 그는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의식은 백조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 백조가 한때 루드라 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슴속에서는 '나는 루드라이다.'라는 확신이 일어났습니다. 즉시 그 백조는 백조의 몸을 버리고, 루드라 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루드라는 루드라 신의 거처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루드라가 참된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전에 일어났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루드라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자, 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이 마야는 얼마나 신비스러운가! 비록 세상이 비실재적이지만, 그것은 실재적인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우선, 나 자신인 그 무한한 의식 속에서 아직도 우주적이고 전지적이기는 하지만, 객관적 의식을 가진 마음이 생겨났다. 그 다음 우연히 나는 우주적 원소들 가운데 가장 미세한 부분에 애착을 느끼고, 또한 그 부분에 매료당한 지바가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세상의 주기 동안 나는 마음이 완전히 흔들리지 않는 탁발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모든 혼란을 극복하고 계속 명상 수행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모든 활동은 이전의 활동보다 더욱 강력했다. 탁발 수도승은 자신이 지바타라고 생각했고, 또 그는 그렇게 되었다. 그 이후에 그는 브람마나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보다 강력한 형태의 생각이 보다 약한 형태의 생각을 이긴다. 그 다음 마침내 지속적인 명상 때문에 그는 왕이 되었다. 식물이 빨아들인 물은 결국 그 식물의 열매가 되는 것이 확실하지 않겠는가! 왕에게 어울리는 쾌락과 관련되는 것은 요정들이다. 그 요정들을 생각하면서 왕은 요정이 되었다. 순전히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이 요정은 사슴이 되었다. 그 사슴은 자신이 뚫려서 구멍이 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덩굴식물이 되었다. 벌을 생각하면서, 그 덩굴식물은 그때 그 덩굴식물에다 구멍을 낸 벌이 되었다. 그 벌이 코끼리가 된 것이다.

나는 지난 백 번에 걸친 세상의 순환 주기 동안 루드라 신으로 지냈던 루드라이다. 그리고 나는 심리적인 명상에 지나지 않는 이 현상계를 떠돌아다닌다. 어떤 세상의 주기에서 나는 지바타였고, 다른 주기에서는 나는 왕이었으며, 또 다른 주기에서는 나는 백조였다. 이와 같이 나는 마음과 몸이라고 하는 이 수레바퀴를 타고 돌고 있었다.

내가 그 지고의 참나 즉 무한한 의식으로부터 벗어난 지 영겁의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타락한 직후에는 나는 여전히 진리의 지식을 갖춘 그 탁발 수도승이었다. 그러다가 많은 윤회를 겪은 뒤에 우연히 보게 된 루드라 신의 은총으로, 나는 루드라가 되었다. 지바가 우연히 깨달음을 얻은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그 불순한 바사나(경향성)는 멀리 외면되게 된다. 이것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과의 접촉을 끊임없이 갈망하는 그런 사람에게 일어난다. 그러한 끊임없는 갈망 그 자체가 구체화되어, 하나의 기정사실이 된 것이다.

루드라는 다음과 같이 계속 회상했습니다.

이 비실재적인 자각이 확장되는 것은 바로 '이 몸이 나의 참나다.'라는 내면의 확신 때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만약 사람이 그 참된 본성을 탐구한다면, 그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무로 통하는 이러한 탐구의 이야기도 이제 그만 하자. 이 세상은 하늘의 푸른빛처럼 하나의 시각적인 환영이다. 그것은 무지이다. 그러한 무지를 정화시키려는 이러한 노력에 대해서도 이제 그만 이야기하자. 비실재적인 이 현상계가 계속 나타난다면, 그렇게 내버려두라.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해도 끼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가상적인 변화의 연결 고리를 다시 조사하여, 그들의 기본적인 통일성을 되찾겠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렇게 결심을 한 뒤에, 루드라는 탁발 수도승의 몸이 누워 있던 곳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 몸을 일깨워 그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것을 디억하도록 거기에다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탁발 수도승은 루드라가 그 자신의 참나인 것을 보았고, 또한 과거의 모든 일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똑같은 무한한 의식 속에서 지바타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그의 시신을 소생시켰습니다. 그 셋은 실제로 하나입니다. 이러한 신비를 보고 아연실색한 이들 셋은 그 다음 아내의 품에 안겨 잠자고 있던 브람마나의 거처로 갔습니다. 그들은 그의 의식을 깨웠습니다. 그 다음 그들은 왕이 요정들에 둘러싸여 왕의 침실에서 잠자고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또한 왕의 지성을 깨웠습니다. 그도 또한 진리를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루드라가 된 그 백조가 사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과거 백 번이나 루드라로 태어났던 루드라의 세상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무한한 의식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이 모든 다양한 가공적인 사건들이 분명히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의 형태가 말하자면 다수의 형태가 된 것입니다. 이 백 명의 루드라는 전 우주에 충만해 있었고 또한 편재해 있었습니다.

지바는 그 자신으로부터 일어나는 세상에 의하여 사방이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각성하지 못한 지바들은 서로 서로를 보지 못하며, 서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든 파도들이 똑같은 물질이며 따라서 하나이듯이, 깨어 있는 지바들도 그들 자신이 하나임을 깨닫고 서로 서로를 이해합니다. 개개의 지바는 그 자체의 가공적인 현상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땅을 파는 곳마다 텅 빈 공간을 발견하듯이, 지바가 이 현상계를 탐구하면 그것은 늘 똑같은 무한한 의식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분리된 의식은 속박입니다. 반대로 해방은 분리된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그 무엇이 그대를 만족시킬지라도, 그것을 긍정하고 그것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십시오.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각은 그 둘 속에서 똑같기 때문입니다. 무지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을 잃는다고 해서 누가 슬퍼하겠습니까? '고요히 있음'으로써 얻어지는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이미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들 모두가 루드라 신과 더불어 그들의 영적 의식의 각성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루드라의 일부인 것을 깨닫고,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루드라는 마야가 일어날때 그 마야의 연극을 보았으며, 그는 다른 이들에게 다시 한 번 그 속에서 그들의 역할을 하도록 격려했으며, 그처럼 겉으로 보기에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끝난 뒤에는 그들을 보고 그에게 되돌아오라고 명령했고, 그리고 이 세상의 주기가 끝날 무렵에 그들은 지고의 상태에 도달할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그 다음 루드라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지바타와 그 밖의 다른 이들은 그들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지바타와 다른 이들은 그 탁발 수도승이 꿈 속에서 본 단순한 대상들(가상적인 실체들)이 아닙니까? 그들이 어떻게 진짜 실체가 될 수 있었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상상이 실재적인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버리십시오. 이와 같이 환영의 가공성이 버려질 때, 존재하는 것은 무한한 의식 속에서 존재합니다. 꿈 속에서 본 것과 실재하는 것으로 상상한 것은 마치 여행자에게 시간적 공간적 경험이 상이한 장소에 따라 실재하는 것과 꼭 같이, 언제나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 무한한 의식의 가슴속에 모든 것이 존재하며, 사람은 그 안에서 보는 것을 직접 경험합니다.

생각의 형태가 가지고 있는 꿈과 같은 속성은 오직 강렬한 요가의 수행을 통해서만 까달을 수 있지, 다른 방식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쉬바 신과 다른 신들이 어디에서든지 모든 것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그대 앞에 있으며 동시에 그대 마음에 의하여 이해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자각이나 그러한 존재에 오해가 있다면 깨달아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오해가 존재하지 않을 때만 그 대상을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소망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오직 그의 내면의 존재가 오로지 전적으로 그 바라는 것에 헌신할 때만 얻어집니다. 이와 같이 자기 앞에 있는 것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자는 자기 앞에 있는 그것을 완전히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상의 대상에 완전히 헌신하는 자는 그 가상의 대상을 완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한 목표를 향한 그러한 헌신이 없다면, 그는 그 대상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탁발 수도승이 루드라와 그 나머지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한 목표를 향한 헌신에 의해서 가능했습니다. 그들 각각이 그 나름의 세상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속에서 루드라 의식이 일깨워질 때까지는 그들은 서로를 몰랐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베일에 가려지고, 또 그들이 서로 다른 형태와 본성을 지니게 된 것도 사실상 루드라의 뜻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나 다수 혹은 무학자나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천인이 되게 해 주소서.', '학자가 되게 해 주소서.'와 같은 기원에 대한 한 목표를 향한 명상에 의해 가능하며, 또한 그러한 명상의 결실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신이나 혹은 인간이 되고, 그에 따라서 작용하는 것은 집중과 명상에 의해 가능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모든 것의 진정한 참나인 무한한 의식은 무한한 힘을 부여받았지만, 지바(본질적으로 참나와 전혀 다르지 않은)는 (그 개념에 어울리는) 하나의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지바의 본성에 따라서, 그것은 무한한 힘이나 한정된 힘을 즐길 수 있습니다. 무한한 의식은 팽창과 수축이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지바는 그것이 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능력을 획득한 요기들은 여기에서와 또한 다른 어디에서도 존재하며, 그러한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유명한 까르따비르야가 집에 있으면서도, 다수의 가슴속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것과 꼭 같이, 그 요기들은 여기저기에서 그리고 여러 다른 장소에서 즐겨지기 때문에, 그러한 경험이 다수이고 여러 가지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예로는 라디오가 있다. 즉 방송실을 떠나지 않고서도 말하는 사람이나 가수는 수많은 응접실로 들어갈 수 있다. S.V.)

마찬가지로, 비슈누 신은 그의 거처를 떠나지 않고, 이 지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인드라 신(신성한 의식을 주재하는)도 그의 천상의 거처를 떠나지 않고, 그러한 의식이 거행되는 일천 개의 장소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헌신자들의 부름에 응하여, 하나인 비슈누 신이 수천의 비슈누 신이 되어 헌신자들 앞에 나타납니다. 그와 꼭 같이, 지바타와 탁발 수도승의 상상이나 소망이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 이들과 그리고 루드라의 의식에 의해 생명력을 갖게 된 이들 모두는 그들의 다양한 거처들로 돌아가서 마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작용을 했습니다. 그들은 얼마 동안 각기 다른 역할들을 행하고 난 뒤 루드라의 거처로 돌아갔습니다.

이 모든 것이 비록 탁발 수도승과는 별개인 것처럼 보였지만, 탁발 수도승의 의식에 떠오른 한 순간의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그와 곡 같이 무수한 존재들의 탄생과 죽음은 말하자면 하나의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현상계에서 다양성을 상상하고, 그 다음 그들은 참나 속에서 일원성을 추구합니다. 그들이 죽을 때 그들은 마치 외부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 내부에 있는 또 다른 존재의 상태를 상상합니다. 육체를 가진 존재들은 해방을 실현할 때까지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겪습니다. 나는 이러한 진리를 예시하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그대에게 했습니다. 이것은 그 탁발 수도승의 운명일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지고의 참나와 자신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그런 존재는 그 자신의 생각들이 독립해 있고, 또한 완전히 실재하며, 가공이 아니라고 상상합니다. 그러한 하나의 꿈에서부터 그는 또 다른 꿈으로 나아가며, 마침내는 '나는 몸이다.'라는 그릇된 생각을 버리게 됩니다.

라마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아, 얼마나 경이로운 이야기입니까! 신이시여! 당신은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것이 실재하며, 또한 실재하는 것으로 체험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디 이 탁발 수도승도 또한 다른 어딘가에 존재하는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나중에 답해 주겠습니다.(모인 사람들은 이때쯤 정오 기도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왕이시여! 오, 라마여! 나의 지혜로운 눈의 도움을 받아, 나는 그 탁발 수도승을 찾았습니다. 나는 그 탁발 수도승을 보고 싶어 깊은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이 우주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그를 찾았지만, 그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상상이 또한 실재하는 것처럼 어떻게 바깥에 나타나겠습니까?

그 다음 나는 지나스의 땅이 있는 북쪽으로 나아갔습니다. 개밋둑 위에 사람들이 거주하는 바하라(성지? 또는 비하르)가 존재합니다. 거기 그 자신의 오두막집에 머리 색깔이 노란 디르가드르샤라고 하는 탁발 수도승이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명상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시종조차 그의 명상을 방해할까 두려워 오두막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날이 그러한 명상에 잠긴 지 스물하루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이 그의 마지막 날이 되게끔 운명 지어져 있었습니다.

한 관점에서 보면, 그는 불과 스물하루밖에 명상에 들지 않았으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수천 년의 세월이 이미 지나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그의 마음에서 일어난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러한 탁발 수도승이 다른 시대에도 살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이번 시대에 들어와서도, 그는 두 번째의 그러한 탁발 수도승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두 명 이외에 나는 세 번째의 탁발 수도승을 볼 수 없었습니다. 내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기지와 내가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모든 능력들로, 나는 세 번째 탁발 수도승을 찾아서 바로 이 세상의 중심부까지 들어갔습니다.

마침내 나는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우주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또 다른 브람마가 창조한 우주이기는 하지만, 이 우주와 거의 똑같은 다른 우주에 있었습니다. 그와 꼭 같이, 그곳에는 지금까지 수많은 존재들이 존재해 왔고, 그리고 미래에도 존재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 모인 이 자리에서도 이와 같이 생각을 가지게 되면, 곧 나타나게 될 다른 존재들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될 현자와 거룩한 브람마나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마야의 본질입니다. 이들 가운데 어떤 존재들은 그들을 상상한 사람과 같은 본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다른 존재들은 본성이 아주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른 존재들도 부분적으로 그들을 닮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큰 마야는 심지어 위대한 사람들조차 좌절시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작용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나타나게 하고 또 사라지게 하는 것은 오직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물하루라는 짧은 기간이 어디에 있으며, 한 시대 전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음의 작용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무서운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침에 연꽃처럼 피고, 또 만개한 연꽃처럼 다양성을 드러내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이 모든 것은 순수한 그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현상은 불순함에 물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개개의 사물은 마치 분리된 것처럼 나타나고, 그 분리된 존재의 마지막에 가서는, 그것은 다른 이상한 분리를 겪습니다. 이 모든 것은 완전히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만물 속에 나타납니다. 원인은 원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다샤라타는 말했다.

오, 현자시여! 그 탁발 수도승이 어디에서 명상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즉시 나의 병사들을 파견하여 그를 명상에서 깨워 이곳으로 데려오겠습니다.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 왕이시여! 그 탁발 수도승의 육신은 이미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몸은 소생시킬 수 없습니다. 그의 지바는 깨달음과 해방을 이미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이 현상계의 경험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습니다. 그의 시종들은 그에게 지시받은 대로 한 달이 끝날 때, 그의 오두막집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그 집 밖에서 서 있습니다. 그들은 그때쯤 그가 그의 몸을 버리고, 자기 자리에 다른 누군가를 대신 앉혀 놓은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마야(즉 현상계나 망상)는 유한하고 한정적인 특성과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지 때문에 그것을 건너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이 있으면, 그것을 쉽게 건널 수 있습니다.

황금을 팔찌로 보는 것은 잘못된 자각입니다. 단순한 현상이 그러한 잘못된 자각의 원인이 됩니다. 이 마야(실재하지 않는 현상)는 단지 말의 멋진 수사에 불과합니다. 현상과 절대적인 참나의 관계는 파도들과 바다의 관계와 꼭 같습니다. 이 진리를 알게 되면, 현상은 더 이상 망상이 아닙니다. 긴 꿈과 같이 이 현상계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무지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바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이 모든 것이 참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마음에 가지는 생각이 무엇이든 간에, 그 생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참나뿐입니다. 이 우주는 이와 같이 무수히 많은 그러한 개인들이 마음에 가진 생각들의 결과입니다. 브람마가 가진 최초의 생각은 지바에 의해 확실한 실재로서 체험되었습니다. 그러나 브람마의 의식과 같은 의식의 순수성에 도달하면,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긴 꿈으로 보게 됩니다.

사물에 대한 생각이 있으면 마음이 생기고, 그럼으로써 무한한 의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 다음 그것은 다양한 경험들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절대적인 참나와 관계가 없는 것일까요? 그 절대적인 참나는 또한 마음이 아닐까요? 지바와 몸과 그리고 나머지 그 모든 것은 그 절대적인 참나의 그림자 혹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이 모든 움직임 등은 영원히 무한한 그 하나의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의식은 의식이지,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움직임 등의 말은 가상의 표현입니다. 움직임도 없고, 또한 움직임 없음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고, 또한 다수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입니다. 다양성은 깨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며, 사람이 자신의 탐구를 시작하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탐구자는 존재하지만, 어떤 의심도 없스비다. 이것이 정말로 지고의 상태입니다. 평화는 세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평화만이 이 현상계로서 오로지 존재합니다. 무지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도 없고, 보이는 대상도 없으며, 또한 봄도 없습니다. 마음은 달 속에 하나의 결함이 있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달은 결함으로서 거기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한한 의식은 그 '몸'이나, 나타남이나 혹은 현상으로서 오로지 의식만을 가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깊은 수면과 같은 침묵에 의지하며, 생각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상태에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영원히 계십시오.

라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시여! 저는 지금까지 말의 침묵이나 눈과 기타 감각 기관의 침묵에 대해서는 들어봤습니다. 그리고 또한 극단적인 고행의 엄격한 침묵에 대해서도 들어봤습니다. 그러나 깊은 수면과 같은 침묵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라마여! 두 가지 유형의 무니(모우나, 즉 침묵을 지키는 현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엄격한 고행자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된 현자입니다. 전자는 강제로 그의 감각들을 억제하며, 열광적으로 무미건조한(지혜가 전혀 없는) 끄리야(활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해방된 현자는 무엇이 무엇인지를 (진리를 진리로, 비실재적인 것을 비실재적인 것으로) 알고 있고, 참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에서 평범한 사람처럼 활동하고 있습니다. 침묵 즉 모우나로서 간주되는 것은 이들 무니들의 본성과 활동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네 가지 유형의 침묵이 기술되어 왔습니다. 첫째는 말의 침묵이고, 둘째는 눈 같은 감각들의 침묵이며, 셋째는 격렬한 억제이며, 넷째는 깊은 수면의 침묵입니다. 마음의 침묵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침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죽은 사람이나, 엄격한 모우나(까스타 모우나)나, 혹은 깊은 수면의 침묵(수슙띠 모우나)을 수행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이들 중 앞의 세 가지는 엄격한 모우나의 원소들을 필요로 합니다. 정말로 해방에 도움이 되는 것은 네 번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의 세 가지 유형의 모우나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나는 그 세 가지에는 바람직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깊은 수면의 침묵은 해방에 도움이 됩니다. 그 속에서는 쁘라나 즉 생명력이 억제되지 않으며, 또한 촉진되지도 않습니다. 감각들은 먹을 것을 받지도 않으며, 또한 굶어죽지도 않습니다. 다양성에 대한 지각은 표현되지 않으며, 또한 억압받지도 않습니다. 마음은 마음이 아니며, 또한 마음 아님도 아닙니다. 어떠한 구분도 없고, 그러므로 그 구분을 없애려는 어떤 노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깊은 수면의 침묵이라 불리며, 그곳에 자리를 잡은 사람은 명상할 수도 있고, 명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본질에 대한 지식이 있고, 의심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텅 빔입니다. 그것은 지지물도 없습니다. 그것은 지고의 평화 그대로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그것이 실재한다고 할 수 없으며,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나'라는 것도 전혀 없으며, 또 다른 것도 없으며, 마음도 없고, 또한 마음에서 파생된 어떤 것도 없다."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상태와, 사람이 "'나'라는 것은 이 우주에서 단지 하나의 개념에 불과하고, 또 그것은 실제로 순수한 존재이다."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상태, 바로 그것이 깊은 수면의 침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한한 의식인 그 순수한 존재 속에서, '나'라는 것과 '또 다른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라마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오, 현자시여! 백 명의 루드라 신이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탁발 수도승은 백 명의 루드라 신들 모두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마음이 순수하여 불순물로도 더럽혀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무엇을 상상하거나 생기게 하더라도, 그들은 오로지 그것만이 실재하는 것으로 경험합니다. 따라서 어떤 생각의 형태라도 그것이 하나의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나면, 그것은 그렇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라마가 다시 물었다.

오, 현자시여! 어찌하여 쉬바 신은 옷도 입지 않은 채, 온 몸에 재를 바르고, 목에는 인간 해골로 만든 화관을 걸치고, 화장터에 사는 그런 사람으로서, 또한 욕정에 쉽게 압도당하는 그런 사람으로서 나타나고자 했습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이나 완전한 경지에 도달한 존재들과 해방된 현자들의 행동은 행동 규칙과 규범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무지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의 마음이 심한 조건화를 받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그러한 행동 규칙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다면,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감각들을 자연스럽게 통제하고 있고, 또 늘 방심하지 않고 깨어 있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고자하는 의도도 없이, 또한 되는 대로 사건에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도 않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의 활동은 (야자나무에 내려앉는 까마귀와 어떤 우연한 관계도 없이 떨어지는 야자열매처럼) 순수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는 아무 일도 전혀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삼위일체(브람마, 비슈누, 그리고 쉬바)의 구성원들조차도 이와 같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해 왔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의 활동은 칭찬과 비난을 초월해 있고, 수용과 거부도 초월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다른 것이다.'라고 하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활동은 불의 열처럼 순수합니다.

나는 육체를 떠난 영혼들의 침묵이라고 하는, 다른 형태의 모우나(침묵)에 대해 상세히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간단하게 그것을 묘사하겠습니다. 완전히 깨어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사마디에 들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완전히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상끼야 요기들이라고 합니다. 쁘라나야마 등을 통해서 몸이 없는 의식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은 요가 요기들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 둘은 본질적으로 꼭 같습니다. 이 현상계와 속박의 원인은 실제로 마음입니다. 이 두 길은 마음의 그침으로 통합니다. 그러므로 쁘라나의 움직임을 멎게 하거나, 혹은 생각을 멎게 하는 수행을 헌신적으로 꾸준히 함으로써 해방은 얻어집니다. 이것이 해방을 다루는 모든 경전의 진수입니다.

라마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오, 현자시여! 쁘라나의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 해방이라면, 죽음이 해방이 아닙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죽을 대는 해방을 얻는 것이지요?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 라마여! 쁘라나가 몸을 막 떠나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다음 몸이 만들어질 원소들과 접촉을 합니다. 이 원소들은 실제로 지바의 바사나(심리적인 조건화, 기억의 창고, 과거 인상과 경향성)들이 결정화된 결정체입니다. 이 때문에 지바는 그들 원소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쁘라나가 몸을 떠날 때, 그것은 지바의 모든 바사나를 함께 데려 갑니다.

정말로 이들 바사나가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는 마음이 마음 없음의 상태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은 참나 지식이 일어날 때까지 생명력을 버리지 않습니다. 참나 지식에 의하여 바사나는 소멸이 되고, 마음 또한 소멸이 됩니다. 바로 그렇게 되면 쁘라나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실제로 지고의 평화입니다. 세속적인 대상에 대한 개념들이 비실재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참나 지식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이렇게 되면 바사나도 끝이 나고, 마음과 생명력 사이의 연결도 끝이 납니다. 바사나가 마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음은 바사나의 집합체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만약 바사나가 사라지면, 그 자체가 지고의 상태입니다. 지식은 실재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비차라 즉 탐구 그 자체가 지식입니다.

한 가지 일에 대한 완전한 헌신, 쁘라나의 억제, 그리고 마음의 정지, 이들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완전하게 이루어지면, 사람은 지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생명력과 마음은 마치 꽃과 향기처럼, 혹은 참깨 씨앗과 참기름처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생각의 움직임이 멈추면, 쁘라나의 움직임도 또한 멈춥니다. 마음 전체를 단 하나의 진리에 일방적으로 헌신하면, 마음의 움직임과 더불어 생명력의 움직임은 멈추게 됩니다. 최고의 방법은 무한한 참나에 대한 본성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대의 마음이 완전히 빼앗길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과 탐구는 모두 멈추게 될 것입니다. 그 후에 남아 있는 것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계십시오.

마음이 쾌락을 갈망하지 않을 때, 마음은 생명력과 함께 참나 속으로 흡수됩니다. 무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나 지식이 바로 지고의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하나의 실체로 보일 때, 마음은 오로지 무지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고의 상태입니다. 만약 마음이 15분만이라도 참나 속에 흡수되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변화를 겪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나 지식이란 지고의 상태를 맛보고, 그것을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마음이 1초 동안이라도 그것을 맛보았다면, 그것은 이 세속적인 상태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삼사라(현상계 내지 탄생과 죽음의 주기)의 씨앗 자체가 기름으로 튀겨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함께 무지는 없어지고, 바사나는 완전히 평정됩니다. 여기에 도달한 사람은 사뜨바(진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내면의 빛을 바라보며, 지고의 평화 속에서 조용히 머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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