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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아르주나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4. 26.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우주적 몸(지성의 에너지와 우주적 원소들로 구성된)이나 최초의 우주적 미묘한 몸(뿌르야스따까)이 하나의 생각으로서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일어났듯이, 모든 다른 몸들도 똑같은 식으로 일어납니다. 지바(뿌르야스따까 즉 미묘한 몸)가 자궁 안에 있는 동안 무엇을 생각하든 간에, 지바는 그 생각하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압니다. 대우주 속에서 우주적 원소들이 진화하듯이, 소우주 속에서 그런 원소에 해당하는 감각들도 진화합니다. 물론 그것들이 실제로 창조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표현들과 묘사들은 단지 가르침을 위해 이용되고 있습니다. 가르침에서 사용되는 이런 개념들이 처음 조장하고 불러일으킨 탐구에 의해 없어집니다.

심지어 이 무지를 매우 주의 깊고 예리하게 관찰한다 해도,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비실재적인 것은 비실재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신기루 속의 물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신기루 속의 물은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전혀 물이 아니었습니다. 진리의 빛을 받으면, 모든 사물의 실재는 드러나고, 망상이나 가공의 지각은 사라집니다.

참나는 실재합니다. 지바와 미묘한 몸,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의 본성에 대한 탐구는 분명히 그들의 비실재에 대한 탐구입니다! 지바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비실재의 참된 본성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이 무지한 의식이 지바의 본성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참된 본성을 망강한 채, 그것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아이에게는 밤에 그가 마음에 떠올리는 비실재적인 유령이 정말로 진짜인 것과 꼭 같이, 지바도 그것이 보고 있는 다섯 가지의 원소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들은 단지 지바의 생각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지바는 그것들이 마치 자기 바깥에 있는 양, 그것들을 봅니다. 그것들은 어떤 것은 내부에 있고 어떤 것은 자기 바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그것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공이 공간 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지식은 의식 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은 이제 지식이 그 자신의 대상이라고 믿게 됩니다. 다양한 대상들은 의식 그 자체 내에서 의식과 지식을 주체와 대상으로 구분함으로써 초래된 의식의 개념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 의하여 제한을 받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참나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 안에 본래부터 지식을 갖추고 있는 무한한 의식은 다양한 피조물들을 생각해 냅니다. 이러한 것은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의식의 힘입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둔한 공간은 그 자체 내에서 공간 그 자체를 반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브람만은 그 본성이 무한한 의식이기 때문에 그 자체 내에서 그 자체를 반사할 수 있고, 또 비록 그것이 몸은 없지만, 그 자체를 이원성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 의식이 무엇을 생각하든지 간에, 의식은 생각해 낸 그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 개념과 관념들은 결코 볼모가 아닙니다. 금팔찌의 경우에, 금과 팔찌라는 두 개가 있는데, 그들 중 하나는 실재(금)이고, 다른 하나는 팔찌라는 외양입니다. 그와 꼭 같이, 참나 안에서도 의식과 물질적(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실체의 새념이라는 두 개가 있습니다. 의식은 편재하기 때문에, 개념이 일어나는 마음속에도 늘 존재해 있습니다.

꿈꾸는 사람이 어느 마을을 꿈꿀 때 그 마을은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그는 그 마을에서 당분간 살아갑니다. 조금 뒤에 그는 또 다른 상황을 꿈꾸고, 그는 거기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바도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이동해 갑니다. 몸은 지바가 마음에 품은 생각의 반영에 불과합니다. 비실재적인 것(몸)만이 죽습니다. 그리고 다른 몸으로 분명히 다시 태어나는 것은 비실재적인 것입니다. 사람이 꿈 속에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들을 경험하는 것처럼, 지바의 꿈 속에서도 지바는 세상을 경험하고 그리고 미래에 무엇이 올 것인지 조차도 보게 됩니다.

어제의 잘못이 오늘의 자기 노력으로 비루어져 착한 활동으로 변화될 수 있듯이, 과거의 습관들도 적절한 자기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바에 대한 개념과 눈(eyes) 등의 존재와 기능에 대한 개념은 해방을 얻지 않고서는 일소될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 그들은 번갈아 가며 숨어 있기도 하고 겉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의식에 의하여 환대받은 개념이 몸으로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마음, 지성, 자아감 및 다섯 원소들로 구성된 하나의 상응하는 미묘한 몸(아띠바히까, 뿌르야스따까라고도 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나는 형태가 없습니다. 그러나 미묘한 몸은 지각력이 있고 또한 지각력이 없는 몸을 통해 이 우주에서 떠돌아다니다가, 마치 깊은 수면에 빠진 듯이 살다가, 마침내 그 자체를 정화시키고 해방을 얻습니다. 미묘한 몸은 꿈을 꾸거나 잠을 자는 동안에도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치 깊은 수면에 있는 것처럼 지각력이 없는 '몸들'(생명이 없는 대상들처럼)에서 계속 존재합니다. 이 모든 것은 또한 이 인간의 몸 안에서도 체험됩니다. 인체의 싶은 수면은 둔하고 지각력이 없으며, 그것의 꿈의 상태는 이 창조에 대한 경험이며, 그것의 깨어 있는 상태는 진실로 초월적인(뚜리야) 의식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해방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의 해방의 상태는 바로 뚜리야 의식입니다. 그 너머에 뚜리야 아띠따(뚜리야 너머의)인 브람만이 있습니다. 존재의 모든 원자 속에는 다름이 아니라 지고의 존재가 있습니다. 어디에서 이 세상을 보더라도, 그것은 단지 가공의 현상계에 불과합니다. 이 환영과 그로 인한 이 속박은 심리적 조건화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이러한 조건화가 속박이요, 그것을 버리는 것이 자유입니다. 조건화의 정도가 심하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대상들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조건화의 정도가 중간이면 동물로서 존재하는 것이요, 조건화의 정도가 아주 약하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제 구분의 지각은 그만 합시다. 왜냐하면 이 우주 전체는 단지 무한한 의식의 에너지가 나타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 삼사라(현상계)라고 하는 것은 단지 지바(첫 번째의 사람)가 꾼 최초의 꿈에 불과합니다. 지바의 꿈은 사람의 꿈과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바의 꿈이 깨어 있는 상태로서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상태가 꿈으로 여겨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바의 오랜 꿈은 비록 그것이 비실재적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즉시 물질적 특성이 주어집니다. 지바는 그 꿈 안에서도 한 꿈에서 다른 꿈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꿈을 실재로서 잘못 생각하는 것이 강해질수록, 그 꿈은 사실인 것처럼 경험되고, 그리고 실재적인 것은 비실재적인 것으로 무시됩니다. 신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될 아르주나처럼 지혜롭게 사십시오.

우주 전체는 우주적 의식이라는 하나의 바다에 나타납니다. 그 우주에는 열네 종류의 존재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우주에는 그 주재하는 신으로서 이미 야마, 찬드라, 수리야 그리고 기타의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바른 행동의 강령들을 확립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눈에 띄게 부도덕해지면, 죽음의 신인 야마가 이따금 몇 년간 명상에 몰입합니다. 그 동안에 인구는 폭발적으로 급증합니다.

이 같은 인구의 폭발적 증대를 보고 놀란 신들은 그 인구를 감소시킬 다양한 계략을 씁니다. 이 모든 것이 무수히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현재의 지배자(야마)는 바이바슈바따 신입니다. 그 또한 얼마간 명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지상의 인구가 매우 빠른 속도로 급증하면, 모든 신들은 비슈누 신에게 도와 달라고 호소할 것입니다. 그는 아르주나라고 하는 그의 분신(또 다른 자기)과 함께 끄리슈나 신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그의 형은 정의의 화신인 유디슈띠라 즉 다르마의 아들일 것입니다. 그의 사촌인 두료다나는 아르주나의 동생인 비마와 결투를 벌일 것입니다. 사촌 사이에 벌어지는 이 전투에서 18개 사단의 육군이 죽을 것입니다. 이렇게 비슈누 신은 지상에서의 짐을 처분해 줄 것입니다.

끄리슈나와 아르주나는 단순한 인간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아르주나는 양 진영의 군대가 그 자신의 친척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낙심하여 싸움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때 끄리슈나 신은 그에게 최고의 지혜를 가르쳐 그에게 영적인 각성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참나)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영원하며, 이 몸이 죽을 때도 살해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죽거나 그것이 살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지한 자입니다. 둘째가 없는 하나뿐이며, 공간보다 더 미묘한 이 무한한 존재가 어떻게, 왜, 누구에 의해 파멸되겠습니까? 아르주나여! 무한하고,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영원하며, 또한 순수한 의식의 본성을 지니고 있어서 물들지 않는 참나를 바라보십시오. 그대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영원합니다!"

끄리슈나 신은 계속해서 아르주나에게 가르칩니다.

아르주나여! 그대는 살해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 헛된 자기중심적인 개념을 버리십시오. 그대는 늙음도 죽음도 없는 참나입니다. 자아감이 없는 자와 지성이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는 죽지도 않으며, 또한 심지어 그가 온 세상을 멸한다 해도 속박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나다.'와 '이것이 나의 것이다.'라는 잘못된 개념들을 버리십시오. 오로지 이 잘못된 개념들 때문에 그대는 '나는 죽는다.'라고 생각하고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참나 또는 무한한 의식의 여러 다른 양상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한다.'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오직 자기중심적이고 무지한 사람인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고, 혀로 맛을 보십시오. 이 모든 활동 속에서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심지어 마음이 계속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품을 때도, '나'라고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요인들이 하나의 활동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행위자의 신분을 맡아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요기들은 자기 정화를 위하여 단지 그들의 마음과 감각들에 의해 활동을 합니다. 자아감에 오염된 사람은 비록 그가 박식한 학자이든 아니면 그보다도 훨씬 더 우월한 사람이든 간에, 진실로 사악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자아감이 없고 소유욕이 없으며, 쾌락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한 사람은 인정된 것을 하든 금지된 것을 하든지 간에 속박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 아르주나여! 이제 전사로서 그대의 의무는 비록 그것이 폭력을 수반하기는 하지만  적절하고도 고귀합니다. 그대에게 적절한 활동의 수행은 비록 그것이 경멸박을 만한 부당한 것일지라도 최선의 것입니다. 그 정당한 행위를 통해 이곳에서 불멸의 존재가 되십시오. 심지어 바보의 자연스러운 활동도 그의 입장에서는 고귀합니다. 하무며 선량한 사람의 경우에는 이것이 얼마나 더 고귀하겠습니까! 요가의 정신에 자리를 잡고 아무 집착이 없이 행위를 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속박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브람만이 평화이듯이 그대도 평화롭게 계십시오. 브람만의 본성을 그대의 활동으로 삼으십시오. 이렇게 모든 것을 브람만에게 바치는 봉헌물처럼 할 때, 그대는 즉시 브람만이 될 것입니다. 신은 만물에 내재해 있습니다. 신에게 바치는 하나의 봉헌물처럼 그대의 모든 행위들을 행함으로써, 만인이 숭배하는 신처럼 밝게 빛나십시오. 모든 생각과 개념들을 단호히 버림으로써 진정한 산야시(포기자)가 되십시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그대는 그대의 의식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모든 생각과 개념들 또는 심상들을 멈추고 또한 강한 심리적인 조건화를 멈추는 것이 지고의 참나 즉 브람만입니다. 이 목적을 향해 노력해 가는 것이 요가와 지혜(냐나) 둘 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브람만만이 이 세상과 '나'를 포함한 전부라는 확신을 '모든 것을 브람만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끄리슈나 신은 아르주나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브람만은 내부에 비어 있고, 바깥도 비어 있습니다(분화되지 않은 동절의 상태로). 그것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며, 또한 관찰자와 다른 것도 아닙니다. 현상계는 그것의 지극히 적은 일부로서 그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 '세상'은 사실상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은 진실로 아무것도 없고 실재하지 않는 텅 빔입니다. 불가사의하게도 이 모든 것 속에서, 현상계와 비교했을 때 지극히 작은 '나'라는 느낌이 일어납니다. 무한한 것은 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분할되지 않지만, 이 '나'라는 느낌 때문에 나누어지는 것 같습니다. '나'라는 것이 무한한 의식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항아리와 같은 물질적인 물건과 원숭이와 같은 살아 있는 존재들도 서로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나'라는 것을 붙잡고 싶어 하겠습니까? 무한한 의식만을 붙잡으십시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 자체의 신비스러운 에너지에 의해 이 모든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와, 그 결과 자신의 자연그러운 활동의 결과를 즐기려는 갈망들이 없어지는 것을 '포기'(산야사)라고 합니다. 포기는 희망과 포부들의 포기입니다. 모든 현상과 변화 속에서 신의 존재를 느끼고, 또 이원성에 대한 모든 망상을 버릴 때, 그때가 신에 대한 복종으로 간주되거나 혹은 참나의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나는 희망이요, 세상이며, 활동입니다. 나는 시간이요, 하나이며, 또한 다수입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을 나로 가득 채워, 나에게 헌선하고, 나를 섬기며, 나에게 경의를 표하십시오. 이렇게 변함없이 나와 하나가 되고, 나를 궁극의 목표로 삼을 때, 그대는 나에게 다다를 것입니다.

오, 아르주나여! 나는 일상적인 형태와 지고의 형태라는 두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형태란 손 등을 부여받은 것이며, 또한 소라, 원반, 홀 등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지고의 형태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두 번째도 없는 하나인 것입니다. 그것은 브람만, 참나, 지고의 참나 등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충분히 깨어나지 않는 한, 그는 평범한 형태를 숭배합니다. 그러한 숭배에 의해 그는 영적으로 깨어나게 되고, 그러면 그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고의 형태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대가 나의 가르침에 의해 깨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영원히 요가 속에 단단히 자리를 잡은 채, 모든 것 속에 있는 참나와 참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바라보십시오. 이렇게 자리를 잡은 사람은 비록 그가 이곳에서 자연스런 활동들을 계속 행할지라도 다시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하나의 개념은 다수의 개념을 없애기 위해 사용됩니다. 참나(무한한 의식)의 개념은 하나의 개념화를 없애기 위해 사용됩니다. 참나는 존재나 비존재로서 생각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질입니다.

모든 존재에게 순수한 경험으로 빛나는 내면의 빛, 그것만이 '나'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참나입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끄리슈나 신은 계속하여 아르주나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 속에 존재하는 맛의 순수한 경험은 참나입니다. 모든 창조물에게 존재하는 경험의 능력, 그것은 편재하는 참나입니다. 그것은 마치 버터가 우유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것 속에 존재합니다.

천 개의 항아리가 쌓인 더마 속에서도 그 모든 항아리의 안과 밖에는 분할할 수도 없고 나누어지지도 않는 공간이 있는 것처럼, 참나도 삼계의 모든 존재 속에 고루 퍼져 존재하고 있습니다. 진주 목걸이에서 연결하는 실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있는 것처럼, 이 참나도 그 자체는 보이지 않는 상태로 있으면서, 모든 것을 연결하며, 모든 것을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그 진리나 실재가 바로 창조주 브람만에서부터 풀잎에 이르는 모든 사물에 충만해 있는 참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브람만 안에는 역시 브람만인 작은 나타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지와 망상 때문에 '나'라는 것과 세상이라는 것으로 여기에 알려져 있습니다. 오, 아르주나여! 이 모든 것이 단지 하나의 참나일 때, '좋은', '좋지 않은', '불행' 등과 같은 표현은 물론이요, '이 사람이 살해당했다.'와 '그가 사람을 죽인다.'와 같은 표현이 가지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참나가 이 모든 변화의 목격자이고, 참나가 이들 변화에 의해서도 전혀 변화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바로 진리를 알고 있는 자입니다.

비록 내가 다양성을 암시하는 표현들을 사용하지만, 실재는 비이원적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과 창조와 소멸은 참나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참나는 마치 견고성이 바위의 특징이고 유동성이 파도의 본질인 것처럼, 존재의 총체성 바로 그 자체입니다.

만물 속에서 참나를 보고 참나 속에서 만물을 보는 사람과, 참나가 비행위자(비이원적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보는 자입니다. 마치 금이 모양과 크기에 관계없이 금으로 만들어진 모든 장신구들에 존재하는 실재인 것처럼, 물이 그 모양과 크기에 관계없이 바다의 파도와 물결에 존재하는 실재인 것처럼, 지고의 참나 즉 무한한 의식만이 다양한 피조물들의 세상처럼 보이는 것 속에 존재하는 실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대는 헛되이 슬퍼합니까? 이 모든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그대가 마음을 바쳐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해방된 사람들은 이렇게 스스로 의문을 던짐으로써, 완전한 자유와 더할 나위 없는 균형 속에서 세상을 떠돌아다닙니다. 현자들은 그들의 욕망들이 그들 자체(욕망)들에 돌아섰고, 그들의 망상은 이미 떨어져 나갔으며, 어떤 것에도 집착이 없이 참나 지식에 단단히 자리를 잡은 채,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원성의 모든 의식을 벗어났기 때문에, 지고의 상태에 도달합니다.

끄리슈나 신은 계속 아르주나에게 가르칩니다.

내가 그대에게 들려 주려는 이야기에 다시 귀를 기울이십시오. 나는 그대가 나에게 소중하기 때문에 그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것을 그대에게 말합니다.

그대가 어떤 쾌락과 고통을 받더라도, 어떤 더위와 추위를 받더라도, 그것들을 견디어 내십시오. 왜냐하면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부분들도 전혀 없는 참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감각적 경험은 가공의 원소들과 접촉한다는 망상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를 알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이는 분명히 해방을 얻을 것입니다. 참나만이 존재할 때, 쾌락과 고통이 일어날 여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고의 참나만이 편재하므로 쾌락과 고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실재적인 것은 어떤 존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실재하는 것은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참나는 쾌락을 향유하지도 않고, 또한 고통을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몸 안에 거주하면서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몸이 썩서 없어져도 참나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몸 등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또한 참나와 무관한 고통 등과 같은 실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경험한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완전히 깨어 있는 사람은 그러한 망상이 전혀 없습니다.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보는 망상이 올바른 이해와 함께 사라지듯이, 몸이나 슬픔 등에 대한 망상도 영적인 일깨움이 있으면 사라집니다. 올바른 이해나 영적인 일깨움이란, 보편적인 브람만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또한 죽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쾌락은 물론이요, 자만과 슬픔, 두려움, 욕망과 같은 망상의 세력들을 소멸시키십시오. 짝을 이룬 그러한 정반대의 말들은 가공적인 것입니다. 하나라는 것에 자리를 잡고 계십시오. 그대는 의식이라는 단 하나의 바다입니다. 고통과 쾌락, 이익과 속실, 승리와 패배는 무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로 머물러 계십시오. 그대가 무엇을 하고, 먹고, 신에게 바치고, 주더라도, 그 모든 것은 참나입니다. 그대의 내면의 존재가 무엇이든 간에, 그대는 틀림없이 그것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브람만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그대의 존재 전체를 브람만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활동하지 않음 속에서 활동을 보고, 활동 속에서 활동하지 않음을 보는 사람은 현명한 자이며, 그는 모든 것을 성취합니다. 활동의 결과들이나 활동하지 않음에도 집착하지 마십시오. 집착은 진정으로 '행위자의 신분'입니다. 또한 그것은 '비행위자의 신분'(자기중심적으로 '내가 한다.'나 혹은 '내가 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이기도 합니다. 이 둘 다가 모두 어리석음의 양상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을 버리십시오. 심지어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을 때라도 다양성의 개념들을 버리십시오. 그대는 활동들의 행위자가 아닙니다. 참나 지식의 불 속에서 활동들이 소진되고, 그러므로 욕망이 전혀 없는 그런 사람은 현명한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신체 기관들을 억제하면서 쾌락의 심적 경험에 탐닉하는 자는 위선자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감각들을 억제하면서, 애착 없이 그의 신체로 일하는 이는 보다 우수한 사람입니다. 마치 강물이 바다 안으로 흘러 들어가듯이,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욕망들이 욕망들 그 자체 안으로 파묻히게 하는 사람은 욕망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평화롭습니다.

끄리슈나 신은 계속 다음과 같이 아르주나를 가르칩니다.

어떤 포기도 없이, 그리고 '내가 즐긴다.'든가 혹은 '내가 고통 받는다.'라는 자기중심적인 느낌도 없이, 모든 자연스러운 상황들에서 평온한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참나 아닌 것(의식 아닌 것)에 대하여 '이것은 참나 즉 의식이다.'라는 느낌을 가지지 마십시오. 몸이 썩어 없어져도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습니다. 참나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참나는 불멸의 무한한 의식입니다. '참나는 죽어 없어진다.'라는 생각조차 마음에 블어오게 하지 마십시오. 썩어 없어지고 변화하는 것은 '이것을 잃었다.'든가 '이것을 얻었다.'라는 생각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참나는 계속 실재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비실제적인 것은 전혀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만물에 충만해 있는 참나는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끝이 있지만, 참나(무한한 의식)는 영원합니다. 참나 즉 무한한 의식은 하나이며 비이원적입니다. 이원성에 대한 모든 분별심을 버리고도 남아 있는 것, 그것이 참나이며 지고의 진리입니다.

아르주나가 이렇게 묻습니다.

오, 신이시여! 그렇다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천국과 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끄리슈나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지바나 살아 있는 영혼이나 성격은 원소들(흙, 물, 불, 공기, 공간)로 짜여진, 또한 마음과 지성으로 짜여진 그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바는 잠재되어 있는 경향성(과거의 인상, 기억 따위)들에 이끌려, 소위 몸이라고 하는 새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몸은 노쇠해지고, 지바는 마치 나뭇잎을 눌렀을 때 거기에서 즙이 나오는 것처럼 그 몸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감각들과 마음을 함께 데리고 그 지바는 마치 향기가 그 근원을 떠나 나아가듯이 몸을 떠나 앞으로 나아갑니다. 지바의 몸은 바사나, 즉 몸에 남아 있는 인상들에 불과합니다. 지바가 몸을 떠난 뒤에는 몸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때 그것은 '죽었다'고 합니다.

공간 안의 그 어디를 떠돌아다니든, 쁘라나 즉 생명력의 본성을 가진 그 지바는 이전의 바사나 즉 인상들에 의하여 불러낸 형태들을 모두 보게 됩니다. 이 전생의 인상들은 오직 강렬한 자기 노력에 의해서만 소멸됩니다. 산들이 가루가 되어 여러 세상들이 소멸된다 하더라도, 사람은 자기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천국과 지옥도 이들 인상들 즉 바사나들의 투영에 불과합니다.

이 바사나는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일어났고, 그것은 오직 참나 지식이 시작될 때만 없어집니다. 지바가 바사나 즉 정신적 조건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바사나 즉 그 정신적 조건화란 헛된 상상이나 생각의 형태입니다. 아직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살아 있는 동안 이 바사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해방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바사나를 버리지 못한 사람은 비록 그가 위대한 학자라 하더라도 속박되어 있는 것입니다.

끄리슈나 신은 계속 아르주나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이렇게 정신적 조건화를 버림으로써 해방된 영혼이 되십시오. 안으로는 고요와 서늘함을 유지하면서, 인간관계로 야기된 슬픔을 버리십시오. 노령과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의심조차 버리고, 하늘만큼 광활한 비전을 가지십시오. 집착에서 벗어나고, 따라서 혐오에서도 벗어나십시오. 그대에게 자연스러운 활동이면 무엇이든 하십시오.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죽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해방된 현자의 본성입니다.

'나는 이제 이것을 해야겠다.'라든가, '나는 이제 이것을 버려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자는 오직 바보일 뿐입니다.

해방된 현자의 감각들은 자연스럽고도 확고하게 그의 가슴속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편재하는 존재의 화포 위에다 삼계의 그림들을 그리는 자는 바로 마음(가슴)입니다. 마음은 분리와 구별을 일으킵니다. 사실상 그러한 분리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창조물에서 관찰되는 그 분리는 단지 마음이 그린 그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공간은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텅 빔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현상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지 않습니까! 참나(마음이 참나 위에 이 세상을 그린다)가 전 우주에 충만해 있기 때문에, 우주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르게 탐구해 보면, 그 우주는 참나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그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대는 슬퍼합니까? 순수한 공간 속에는 활동이나 움직임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움직임이나 활동 그 자체가 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공간은 시간이나 활동 등과 같은 개념들에 물들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관념이 이런 심상으로 퍼집니다. 순수한 공간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 공간은 어느 때고 분할될 수 없습니다.

오, 아르주나여! 이제 그 환영의 우주는 소멸되었습니다. 그 세상은 순간적인 망상으로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비실재적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한 순간에 이 환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것(마음)은 한 순간을 한 시대처럼 보이게 하기도 하고, 약간의 양을 매우 많은 양처럼 보이게 하기도 하며, 비실재적인 것을 즉시 실재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러한 망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적인 망상이 세상이라고 하는 환영으로 남아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도 무지한 사람의 눈에는 부인할 수 없는 견고한 실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현상계는 무한한 의식의 실재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실재적 본성을 지니고 있느냐 또는 비실재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느냐에 대한 논쟁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양성의 이 세상이 분할할 수 없는 무한한 의식 속에 나타난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부분들과 신들과 악마들과 다른 존재들과 같은 모든 현상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가진 그런 무희를 그린 그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정말로 어떤 변화도 전혀 겪지 않는 그것들의 바탕일 뿐입니다. 그것은 무한하고 분할할 수 없는 의식입니다.

끄리슈나 신은 계속 아르주나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이것은 정말로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맨 처음 모습이 나타나고, 그 다음 분화가 일어납니다. 그 모습은 마음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무엇이 행해지더라도, 그것은 텅 빔 속에 있는 텅 빔(공간)에 의해 행해집니다. 텅 빔은 청 빔 속으로 녹아 사라집니다. 텅 빔은 텅 빔을 즐깁니다. 텅 빔은 텅 빔에 충만해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바사나(심리적 조건화나 심적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상계는 가공적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이미지가 브람만과 전혀 다르지 않아, 구멍((파손)이나 분할도 없는 무형의 거울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브람만 속에 존재합니다. 바사나라고 하는 것조차 본질적으로 무한한 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어서, 그 무한한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바사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그것의 환영에 단단히 구속되어 있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이러한 바사나 즉 정신적 조건화의 흔적만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곧 거대한 삼사라(현상계, 즉 삶과 죽음의 주기)의 숲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이 바사나의 씨앗을 올바른 이해와 참나 지식의 불길로 태워 없앤다면, 그 타 버린 씨앗은 더 이상의 속박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사나를 태워 버린 사람은 고통과 쾌락에 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마치 연꽃잎이 물 속에서 살아가듯이, 이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아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이시여! 저의 망상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당신의 은총을 통하여 지성의 일깨움을 얻었습니다. 저는 모든 의심에서 벗어났습니다. 저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끄리슈나 신은 다음과 같이 그의 가르침을 마무리 짓습니다.

마음의 변화들이 가라앉으면, 마음은 평화롭습니다. 사뜨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의식은 대상에서 해방됩니다. 순수한 내면의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이며, 그것은 편재합니다. 그것은 순수하며, 생각의 움직임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것은 초월적입니다. 그것은 모든 바사나가 정화되지 않는 한 얻어질 수 없습니다. 열이 눈을 녹이는 것처럼, 순수한 의식은 무지를 녹여서 무지를 없앱니다. 우주 속의 모든 것이기도 하고, 우주 속의 모든 것이 없는 것이기도 하며,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며, 지고의 진리인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끄리슈나 신이 이와 같이 아르주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을 때, 아르주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신이시여! 당신의 가르침이란 태양의 빛을 받고서, 제 가슴속에 있던 지성의 연꽃이 완전히 만발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뒤에, 아르주나는 즉시 그의 무기를 집어 들고, 마치 놀이에 가담하기라도 하듯이 전쟁을 하러 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오, 라마여! 그러한 태도를 갖추십시오. 그리고 포기의 정신을 가지고, 그대가 하는 무슨 일이든 혹은 그대가 경험하는 무슨 일이든 그것이 편재하는 존재인 브람만에게 바치는 봉헌물임을 깨달아, 전혀 집착하지 않은 채로 있으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진리를 깨달을 것이고 그대의 모든 의심이 끝날 것입니다.

그것은 지고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모든 스승 중의 스승입니다. 그것은 참나이며, 안에서부터 세상을 밝히는 빛인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물질들의 실재이며, 물질들에 그 본질적인 특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생각은 오직 탐구의 정신이 없을 때 일어납니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세상이 있기 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등의 개념들이 어떻게 나를 속박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모든 시작과 모든 끝이 전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비이원성의 정신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비록 깨어 있지만 마치 깊은 수면에 빠진 것처럼) 적극적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마음의 혼란을 받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지금 여기서 해방된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으로 보이는 것은 진실로 무한한 의식의 마술(작용)입니다. 여기서는 일원성도 없고 이원성도 없습니다. 나의 가르침들 또한 똑같은 본성에 속해 있습니다! 단어들과 그것들의 의미, 제자, 소망(혹은 제자의 노력), 그리고 단어 사용에 있어서의 구루의 능력, 이 모든 것은 또한 무한한 의식 에너지의 작용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내면적 존재의 평화 안에서, 의식이 진동하니 세상의 비전이 일어납니다. 만약 그 의식이 진동하지 않는다면, 어떤 세상의 비전도 없을 것입니다.

마음은 단지 의식의 움직임에 불과합니다. 이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할 때, 세상의 비전이 생깁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의식 속에서 생각의 움직임은 더욱 강화되고 격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한 주기가 형성됩니다. 무지와 마음의 활동은 서로 서로에 의해 끊이지 않고 영속됩니다.

내면의 지성이 깨어날 때, 쾌락에 대한 갈망은 멈춥니다. 이것이 현명한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쾌락에 대한 갈망이 이처럼 중단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아무 노력도 들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경험을 체험하는 것이 참나의 에너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경험될 수 있는 것을 경험하지 않기로 거부하는 사람은 정말로 막대기로 공을 치는 것처럼 헛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따금 적절한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써 참나 지식을 얻습니다.

해방에 대한 욕망은 참나의 충만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이 없어도 속박은 조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자각이 요구됩니다. 속박과 해방의 유일한 원인은 의식의 움직임입니다. 이것을 자각하면, 이 움직임도 끝납니다. 자아감도 사람이 그것을 관찰하는 바로 그 순간 끝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지할 지지물이 더 이상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 의해 속박당하며, 또 누가 누구에 의해 해방되는 것입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러한 것이 무한한 의식인 지고의 존재의 본성입니다. 창조주 브람마와 비슈누와 쉬바와 같은 대우주적 형상들을 부여받은 이들은 그 지고의 존재 속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에서 이 세상의 군주나 왕으로서 직분을 다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경지에 도달한 현인들도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여러 천국들을 떠돌아다닙니다. 그곳에 도달하면 사름은 죽지도 않고 또한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눈을 깜빡거릴 동안만이라도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의식 그대로이며, 또한 지고의 참나로서 알려져 있는 그 순수한 존재 속에서 사는 현자들은 비록 그들이 이 세상의 활동들에 계속 관여할지라도 두 번 다시 괴로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라마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마음과 지성과 자아감이 모두 작용을 멈추면, 그 순수한 존재 즉 무한한 의식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납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러나 모든 몸들 속에 살면서 여러 가지 경험들을 체험하는, 다시 말해, 먹고 마시고 말하고 모이고 파괴하는 그 브람만은 의식과 그것의 자각과의 분리가 전혀 없습니다. 편재하며, 시작도 끝도 없고, 순수하고, 변화되지 않고, 분화되지도 않는 존재인 그것을 존재(바스뚜-따뜨밤) 혹은 실재라고 합니다.

그것은 공간이 공간 속에 존재하듯이, 소리가 소리 속에 존재하듯이, 접촉이 접촉 속에 존재하듯이, 피부가 피부 속에 존재하듯이, 맛이 맛 속에 존재하듯이, 형태가 형태 속에 존재하듯이, 시력이 눈 속에 존재하듯이, 냄새가 냄새 속에 존재하듯이, 향기가 향기 속에 존재하듯이, 힘이 몸 속에 존재하듯이, 땅이 땅 속에 존재하듯이, 우유가 우유 속에 존재하듯이, 바람이 바람 속에 존재하듯이, 불이 불 속에 존재하듯이, 지성이 지성 속에 존재하듯이, 마음이 마음속에 존재하듯이, 그리고 자아감이 자아감 속에 존재하듯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음속에서 찌따 즉 마음으로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나무 속에 있는 나무이고,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의 부동성이며, 움직이는 존재의 기동성입니다. 그것은 지각력이 없는 것 속에 들어 있는 무지각이며, 지각력이 있는 것 속에 들어 있는 지성입니다. 그것은 신들의 신성이며, 인간의 인간성입니다. 동물에게 그것은 동물성이며, 벌레에게 그것은 벌레의 본성입니다. 그것은 시간과 계절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활동 속의 활력이고, 질서 속의 질서입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의 생명이요, 죽어 없어지는 것의 죽음입니다. 그것은 유년기, 청년기, 노년기이며, 또한 죽음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나누어지지도 않고, 분할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물의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은 비록 앞서 말한 의미(즉 다양성이 무한한 의식에 의해서 생각되고, 또 무한한 의식으로 충만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실재적이지만, 비실재적입니다. 이것을 깨달으십시오. 즉 '이 모든 것이 나로 충만되어 있다. 왜냐하면 나는 편재하고, 몸과 기타 그러한 조건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화와 지고의 행복 속에 안주하십시오.

발미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자 바시슈타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날은 저물었고, 모인 사람들은 저녁 기도를 위해 흩어졌다.

라마가 물었다.

오, 현자시여! 우리가 꿈 속에서 보는 도시 등이 비실재적인 것과 꼭 같이, 창조주 브람마의 꿈인 이 세상도 사실상 비실재적이며 가공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그것이 우리의 비전 속에서 견고한 고정성을 얻게 되었습니까?

바시슈타는 대답했다.

브람마가 창조한 바로 그 최초의 우주는 오늘날에 와서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관찰되고 있지 않습니까! 의식은 무한하기 때문에, 지바와 세상도 또한 어디에서든지 일어납니다. 이 세상은 의심할 바 없이 무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믿음은 진정한 지각을 파괴시킵니다. 비록 이 세상이 비실재적이지만, 자아감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확실한 실재처럼 보입니다. 꿈꾸는 사람은 꿈 속에서 본 대상들이 덧없는 것인 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와 꼭 같이, 창조주의 이 우주적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은 꿈꾸는 사람의 특성을 띱니다. 비실재적인 것에서 태어난 것도 또한 비실재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 세상이 실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비샐재적인 개념(창조주의 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을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무한한 의식인 참나 속에서는 이 세상이 단지 순간적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순간 동안, 그것이 매우 오랜 기간이라는 가공적인 개념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세상은 확실히 실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우주가 창조주의 의식 속에서는 하나의 꿈으로 존재하는 것과 꼭 같이, 그것은 창조주의 꿈의 대상들인 모든 존재들의 의식(꿈) 속에서는 긴 기간으로 체험됩니다.

그대가 꿈 속에서 어떤 형태의 그 무엇을 본다 하더라도, 그대는 그것이 됩니다. 확실히, 마음이 실성한 혹은 혼란된 상태에 있을 때, 마음이 체험할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이 세상에서도 너무나 많은 특별한 현상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불이 물 속에서 타고, 물이 하늘에 떠 있고, 살아 있는 존재들이 바위 속에서 발견되고, 지각력이 없는 기계들이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꿈꾸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분명히 비실재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재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또한 비실재인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주라고 하는 이 꿈 속에서는 모든 것이 어디에서든지 가능합니다! 꿈 속에 빠진 자가 그 꿈을 완전히 실재적인 것으로 보는 것과 꼭 같이, 이 세상에 빠져 있는 자는 이 세상이 완전히 실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꿈에서 다른 꿈으로 이동해 가듯이, 사람은 하나의 망상에서 또 다른 망상으로 이동해 가며, 이 세상을 완전히 실재하는 것으로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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