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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현자의 돌 이야기

by Yuneelif 2018. 6. 25.

반댜 언덕의 어느 마을에 한 부유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숲 속을 걸어가다가 동전 한 닢(1센트)을 잃었습니다. 그는 구두쇠였으므로 무성하게 우거진 덤불 속에서 그 동전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줄곧 그는 "그 1센트가 있으면 어떤 장사를 하겠고, 그러면 4센트가 되고, 또 8센트가 될거야."라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습니다. 지켜보는 구경꾼들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3일 동안 그는 찾았습니다. 그 3일째가 끝날 무렵에, 그는 갑자기 보석 하나를 발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은 현자의 돌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집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구두쇠가 현자의 돌을 찾게 된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확실히 그것은 그의 인색함과 잃어버린 1센트를 위해 수풀을 샅샅이 뒤진 결과입니다! 그와 꼭 같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경우에도 제자는 무언가를 찾아야 하지만, 그가 실제로 얻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아니겠습니까! 브람만은 마음과 감각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가르침이 없어도, 또한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구두쇠는 만약 1센트 때문에 덤불 속을 뒤지지 않았더라면, 그 보석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승의 가르침은 참나 지식의 원인으로 간주되지만, 실제로 그것은 그 원인이 아닌 것입니다. 오, 라마여! 마야에 대한 이러한 신비를 보십시오. 즉 사람은 무언가를 찾지만, 그가 얻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아니겠습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참나 지식이 없기 때문에, 쉬키드바자 왕은 망상으로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오, 라마여! 왕은 곧 그대처럼 그의 대신들이 그에게 맡긴 임무만을 하면서 고독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선 사업에 많은 기부를 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금욕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망상과 슬픔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습니다. 상당히 오랜 심사숙고 끝에 어느 날, 쉬키드바자 왕은 왕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오랫동안 통치자의 신분을 누려 왔고, 또 왕실의 모든 쾌락도 누려 왔습니다. 그러나 쾌락도 고통도, 성공도 역경도 고행자의 마음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숲 속에 들어가서 고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모든 점에서 당신을 닮은 사랑스런 숲(여기서 왕은 숲을 왕비의 수족과 비교하면서 낭만적으로 묘사한다)이 마치 그대가 나를 기쁘게 해 주는 것과 꼭 같이 나의 가슴을 기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훌륭한 주부는 남편의 소망을 가로막지 않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신이시여! 꽃이 봄철에 피어야 어울리고, 열매는 가을에 맺혀야 어울리듯이, 적절한 시기에 행하는 그 행동이야말로 오직 적절한 행동으로서 빛이 납니다. 숲 속의 생활은 노년에 어울리는 것이지, 당신과 같은 나이에 속한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신과 같은 나이에는 집안 생활이 어울리지요. 우리가 좀 더 늙으면, 우리 둘 모두 이 집안 생활을 버리고, 숲 속으로 들어갑시다. 더욱이, 당신이 때 이르게 왕궁을 떠나면 백성들이 슬펴할 것입니다.

쉬키드바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가는 길을 맏지 마십시오. 내 이미 숲 속으로 떠난 몸이란 것을 아십시오. 당신은 단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소. 그래서 당신이 또한 숲 속으로 가서 고된 고행을 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남아서 왕국을 다스리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날 밤, 왕비가 잠든 사이, 왕은 도성을 순찰한다는 핑계로 왕궁을 떠났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말을 타고 달려, 마침내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만다라 산의 숲에 당도했습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이전에 신성한 브람마나들이 거주했던 흔적이 남아 있던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혼자 오두막을 지었고, 거기에다 대나무로 된 지팡이와 밥그릇, 물통, 화분용 접시, 까만달루, 염주, 추위로부터 보호해 줄 의복, 사슴 가죽 등과 같은 고행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았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루의 전반부는 명상과 자빠(신성한 만뜨라의 반복)에 바쳤습니다. 하루의 후반부는 화초를 따는 데 보냈습니다. 그 다음 그는 목욕을 하고, 신을 숭배했습니다. 그 후 그는 과일과 뿌리로 된 검소한 식사를 했습니다. 나머지 시간은 자빠나 만뜨라를 반복해서 암송하는 데 보냈습니다. 이렇게 그는 왕국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그 오두막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추달라는 깨어나서 남편이 왕궁을 떠난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불행하다고 느끼며, 그녀가 있을 장소는 남편 곁이라고 결심했습니다. 재빨리 그녀도 작은 창문을 통해 왕궁을 빠져나와, 하늘 위로 날아 가며 남편을 찾았습니다. 곧 그녀는 숲 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곁에 내려앉기 전에, 그녀의 영적인 힘으로 미래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녀는 가장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일어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았습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는 공중을 통해 날아왔던 똑같은 길로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추달라는 왕이 중요한 임무 수행을 위해 왕궁을 떠났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가 직접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18년 동안 그녀는 왕궁에서, 남편은 숲 속에서 각각 살면서, 서로 한 번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노령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추달라는 자기 남편의 마음이 상당히 성숙해졌음을 보고, 이제 그녀가 남편의 깨달음을 얻는 데 도울 수 있는 적기임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난 뒤, 그녀는 밤에 왕궁을 떠나, 그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녀는 여러 천국에서 천인들과 완벽한 경지에 도달한 현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천상의 향기를 들이마시고, 대단한 현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천상의 향기를 들이마시고, 대단한 열성으로 남편과의 재결합을 고대하면서 구름 속을 뚫고 날아갔습니다. 그녀는 흥분했고, 그녀의 마음은 동요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마음 상태를 알고서, 다음과 같이 혼잣말을 했습니다. "아아! 몸에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사람의 본성은 활동을 멈추지 않는 것이 확실하구나,. 내 마음까지도 이렇게나 동요되다니! 그렇지 않으면, 오, 마음이여! 아마 그대가 그대 자신의 배우자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내 남편은 18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금욕 생활을 한 후라, 틀림없이 자기 왕국과 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을 거야. 그런 경우라면, 오, 마음이여! 그대가 다시 한 번 그를 만날 수 있는 기대로 흥분한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겠지……. 나는 내 남편이 왕국으로 돌아가 나와 함께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남편의 가슴속에 균형을 회복시켜 줘야 돼. 완전한 균형 상태에서 맛보는 그 기쁨은 그 밖의 모든 행복보다도 더 나은 것이니까."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추달라는 만다라 산에 도착했습니다. 어전히 하늘에 머문 상태로, 그녀는 자기 남편이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왕복을 입고 있던 왕이 지금은 쇠약한 고행자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추달라는 남루한 복장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마치 먹물이 흐르는 강물에 목욕이라도 한 듯이 상당히 더러운 안색을 한, 말없이 혼자 있는, 이 가슴 아픈 남편의 광경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잠시 동안 그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아아, 어리석기 때문이구나! 왜냐하면 오직 어리석은 자들만이 지금 왕이 처해 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기 때문이야. 확실히, 그가 이렇게 이 외딴 곳에서 은둔 생활을 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의 망상 때문인 거야.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해 줘야겠다. 나는 변장을 하고, 그에게 다가가야지."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쉬키드바자가 추달라를 무지한 여자로 생각하고 다시 한 번 그녀의 가르침을 거절할까 봐 두려워, 그녀는 젊은 브람마나 고행자로 변신하여 그녀의 남편 바로 앞에 내려앉았습니다. 쉬키드바자는 젊은 고행자를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누구의 영혼의 광채가 더 뛰어난지를 서로 겨루었습니다. 젊은 고행자가 사실상 비교가 안 될 만큼 더 빛났습니다. 그래서 쉬키드바자는 그를 천인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고행자를 상당히 숭배했습니다. 추달라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숭배를 받아들이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두루 돌아다녀 봤지만, 이렇게 헌신적인 숭배를 받기는 처음입니다. 나는 당신의 평온함과 금욕 생활을 존경합니다. 당신은 왕국을 버리고, 숲 속 생활에 의존할 정도로 생명의 위험을 선택했군요."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신의 아들이여! 확실히,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군요.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당신은 나에게 신의 감로를 흠뻑 쏟아 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고, 그녀는 바로 지금 나의 왕국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면에서 그녀와 닮았군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숭배하면서 바친 그 꽃들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사람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오는 손님을 숭배하면, 그의 삶은 결실을 맺지요. 이러한 손님을 숭배하는 것이 신을 숭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지요. 부디 당신이 누구인지와 내가 어떤 은혜로 당신의 방문과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우주에는 나라다라고 하는 거룩한 현자가 있습니다. 옛날 그는 신성한 강가 강의 강둑에 있는 어느 동굴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명상이 끝나 갈 무렵에, 그는 물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것으로 보이는 팔찌 소리를 들었지요. 호기심에서 그는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천상에서 제일가는 몇몇 요정들이 물 속에서 발가벗은 상태로 장난치고 있는 것을 보았지요. 그들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의 가슴은 기쁨으로 넘쳤고, 그의 마음은 순간 육욕에 짓눌려 그 평정을 잃고 말았습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거룩한 성현이시여! 그가 대단한 학식을 갖춘 현자이고, 또 그때 해방된 사람이었으며, 욕망과 애착이 전혀 없고, 그의 의식이 하늘만큼 무한했는데도, 어떻게 그가 육욕에 정복당할 수 있었습니까?

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왕실의 현자시여! 천상의 신들을 포함한 삼계의 모든 존재들은 이원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 몸을 가지고 있지요. 무지하든 현명하든 간에, 사람이 몸을 갖고 태어난 이상 그 몸은 행복과 불행, 쾌락과 고통을 받게 마련입니다. 마음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들을 향유함으로써 사람은 쾌락을 경험하고, 굶주림과 같은 결핍을 통해서 사람은 고통을 체험하지요. 그러한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브람마나(추달라)는 계속 말했습니다.

실재인 참나와 순수한 참나가 한 순간이라도 잊혀지면, 경험의 대상은 확대됩니다. 만약 단절 없는 자각이 있다면, 이것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치 어둠과 빛이 밤과 낮으로 변함없이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쾌락과 고통의 경험도 무지한 사람의 경우에는 몸의 존재를 확인해 주었지요. 그러나 현명한 사람의 경우에는, 그러한 경험이 의식 속에 반영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감명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수정의 경우에서처럼, 현명한 사람은 오직 대상이 실제로 물질적으로 가까이 있을때에만 그 대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은 너무도 심하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는 그 대상이 없어도 그 대상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이 그들의 특징이지요. 즉, 취약성이 점점 감소되는 것이 해방이요, 반면에 마음을 더욱 진하게 채색하는 것이 굴레입니다.

("쾌락과 고통은 그 관련 대상이 없는데도 어떻게 일어납니까?"라는 쉬키드바자의 질문에 대해, 브람마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원인은 가슴이 몸이나 눈 등을 통해 받은 인상에 있습니다. 나중에 이것은 저절로 확대됩니다. 가슴이 동요되면, 기억은 꾼달리니의 거처에 있는 지바를 뒤흔듭니다. 그러면 전신에 뻗어 있는 나디들이 그 영향을 받습니다. 쾌락의 경험과 고통의 경험은 각각 달리 나지에 영향을 미칩니다. 말하자면 고통 속에 있을 때가 아니라, 쾌락 속에 있을 때에 나디는 팽창하고 꽃을 피웁니다.

이와 같이 지바가 동요된 나디 속으로 들어오지 않을 때, 그것은 해방을 얻습니다. 속박이란 다름 아닌 지바가 쾌락과 고통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굴복이 존재하지 않을 때, 해방이 있습니다. 지바란 쾌락과 고통을 '보기'만 해도 동요됩니다. 그러나 만약 지바가 참나 지식을 통하여 고통과 쾌락이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지바는 다시 균형을 되찾게 됩니다. 혹은, 만약 이것들이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또한 그것들 안에서도 그 지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바가 깨달으면, 그것(지바)은 완전한 자유를 실현합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무한한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바가 깨달으면, 그것은 다시 한 번 균형에 도달합니다. 연료가 없는 등불처럼 그것은 다시는 동요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바 그 자체가 비실재적인 것으로 실현되기 때문이고, 또한 지바가 의식에서 나온 최초의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다시 그 의식 속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입니다.

(쾌락의 경험이 어떻게 에너지의 손실을 가져오는지에 대해 상세히 말해 달라는 쉬키드바자의 질문을 받고, 브람마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말씀드렸듯이, 지바는 생명력을 동요시킵니다. 생명력의 움직임은 몸 전체에서 생명의 에너지를 끌어냅니다. 그러면 이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방출되는 생식 에너지로서 내려갑니다.

(본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브람마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래, 브람만만이 브람만으로서 존재했습니다. 그 속에서 무수한 물질이 바다 수면 위의 잔물결처럼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본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브람만과 인과 관계가 없스빈다. 그러나 그것은 까마귀가 야자나무에 우연히 내려앉자 동시에 야자열매가 우연히 떨어지는 것처럼 일어났습니다. 그 본성 속에서 다양한 특징을 부여받은 다양한 피조물이 발견됩니다.

브람마나(추달라)는 계속 말했습니다.

이 우주가 태어난 것도 그 참나의 바로 그러한 본성 때문입니다. 그것은 번갈아 가며 일어나는 질서와 무질서 때문에 생기는 자기 한계나 조건화에 의해 유지됩니다.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 그러한 자기 한계와 그러한 충돌이 없다면, 존재들은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다의 이야기를 계속 하면서, 브람마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곧 나라다는 그의 자제력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흩어져 있던 씨앗을 수정으로 만들어진 항아리 속에 모았습니다. 그 다음 그는 그의 생각의 힘으로 만든 우유를 가지고 그 항아리를 채웠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 항아리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아이를 하나 낳았습니다. 나라다는 그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마침내 그 아이에게 최고의 지혜를 주었스비다. 그 어린 소년은 그의 아버지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나라다는 그 아이를 자신의 아버지인 창조주 브람마에게 데려갔습니다. 브람만는 이름이 꿈바였던 그 소년에게 축복으로 최고의 지혜를 주었습니다.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소년이요, 그 꿈바요, 브람마의 그 손자입니다. 나는 세상을 즐겁게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누구로부터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돌아올 때, 내 발은 땅에 닿지 않습니다.

(바시슈타가 이 말을 할 때, 열입곱 째 날이 끝났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오늘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당신 지혜의 감로를 마실 수 있는 것은 진실로 과거의 수많은 생에 걸쳐 쌓아 놓은 선업의 결과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성자들과의 사귐이 주는 그런 평화를 줄 수는 없스빈다.

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에게 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부디, 이제 당신이 누구이며,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또 여기에는 얼마나 계셨습니까? 충실하게 모든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왜냐하면 속새를 버린 은둔자는 진실 이외의 어떤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신의 아들이여! 당신은 사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달리 내가 말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는 이 삼사라(세상의 순환 주기 또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 주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숲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비록 당신이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만, 나는 간략하게 나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쉬키드바자 왕입니다. 나는 왕국을 버렸지요. 나는 사람이 반복적으로 그리고 번갈이 가면서 쾌락과 고통을, 탄생과 죽음을 경험하는 이 삼사라를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어디든지 떠돌아다니면서 극도의 고행을 해보았지만, 아직까지 나는 평화와 고요함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마음은 편안히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 활동들을 마음껏 즐기지도 않고, 또한 어떤 것을 얻으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나는 여기에 혼자 있으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미건조하며, 성취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한 번도 중단하지 않고 모든 끄리야(행동, 요가의 수행법 중의 하나)들을 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단지 슬픔에서부터 보다 더 큰 슬픔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신의 감로마저 나에게는 독으로 변합니다.

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옛날에 나는 할아버지에게 "끄리야와 냐나(참나 지식) 중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지요. 그때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나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실제로, 냐나가 더 낫다. 왜냐하면 냐나를 통해서 사람은 오직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반면에 끄리야는 하나의 오락으로서 다양한 용어로 기술되어 왔지, 만약 사람이 냐나를 갖지 못하면, 그는 끄리야에 매달리게 된다. 이는 마치 입어야 할 좋은 의복이 없으면, 자루 부대에 매달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그들의 조건화(바사나) 때문에 그들의 행위의 결과라는 덫에 걸리게 된다. 조건화를 버릴 때, 행위는 그것이 인습적으로 좋거나 혹은 나쁜 것으로 간주되든 말든 간에, 행위 없음이 된다. 자기 한계나 의지 작용이 없을 때, 행위는 결과를 맺지 않는다. 행동 자체가 반작용이나 '결과'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행동으로 하여금 결과를 맺도록 하는 것은 바로 바사나나 의지의 작용이다. 마치 놀란 소년이 유령을 생각하고 유령을 보는 것과 꼭 같이, 무지한 사람은 슬픔이란 생각을 품고서 슬픔을 당하는 것이다.

바사나(자기 한계나 조건화)도, 자아감도 진정한 실재는 아니다. 그들은 어리석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 어리석음을 버릴 때, 이 모든 것이 브람만이고 또한 자기 한계라는 것도 없다는 깨달음이 있다. 바사나가 있을 때 마음이 있다. 바사나가 마음속에서 사라지면, 참나 지식이 있다. 참나 지식을 얻은 사람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심지어 신들과 브람마와 다른 이들도 참나 지식만이 최고라고 공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대는 아직도 무지합니까? 그대는 왜 "이것은 까만달루이다.", "이것은 지팡이다."라고 생각하며, 아직까지 무지의 상태에 빠져 있습니까? 그대는 왜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사라지는가?"라고 탐구하지 않습니까? 그대는 왜 굴레와 해방의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상태에 도달하지 않습니까? 그대는 왜 이런 쓸데없는 고행과 끄리야들에 그대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까? 그대가 참나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은 바로 성현들과의 사귐에 있고, 그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에게 물어봅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쉬키드바자는 말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이제 나는 진실로 당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났습니다. 당신은 나의 구루입니다. 나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슬퍼하지 않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부디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왕실의 현자시여! 만약 그대가 수용할 자세로 내 말을 소중히 여긴다면, 나는 그대에게 가르쳐 주겠습니다. 만약 배울 사람이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자기 것으로 만들 의도가 없는데도 장난삼아 단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 사람을 가르치려 한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쉬키드바자로부터 그러한 확신을 받아 낸 후, 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의 깊게 경청하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의 이야기와 닮은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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