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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쉬키드바자와 추달라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6. 25.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라마여! 그와 꼭 같이 바기라타 왕처럼 평온한 상태에 머무르십시오. 그리고 쉬키드바자처럼 모든 것을 포기한 뒤에, 부동의 상태로 계십시오. 나는 그대에게 쉬키드바자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부디 경청하십시오. 옛날에 서로에 대한 신성한 사랑 때문에 나중의 시대에 다시 태어난 두 연인이 있었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오, 현자시여! 한 시대에 남편과 아내로 함께 살았던 부부가 나중의 시대에 다시 남편과 아내로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 라마여! 그런 것이 이 세상 질서의 미묘한 성격입니다. 어떤 것들은 많이 나타났다가, 다시 한 번 더 많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것들은 이전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지만 지금 태어나고, 또 지금 존재했지만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것들은 전에 존재했던 것과 똑같은 형태로 지금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다의 파도와 같습니다. 즉 똑같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상이한 것들도 있는 것입니다.

말바 왕국에 쉬키드바자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이 갖추어야 할 모든 종류의 훌륭한 특성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의로웠고 고귀했으며, 용감하고 예의발랐습니다. 그는 아주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비록 그는 어렸지만 통지차의 신분을 주장할 수 있었고, 유능한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왕국을 다스렸습니다.

봄철이 시작되었습니다. 러맨스의 기운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젊은 왕은 배우자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밤낮 그의 가슴은 애인을 동경했습니다. 명성하고 현명한 대신들은 왕의 가슴 상태를 간파했습니다. 그들은 사우라스뜨라 왕국으로 가서, 그들의 왕을 대신해 공주에게 구혼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쉬키드바자 왕은 추달라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쉬키드바자와 추잘라는 서로에게 너무 열렬히 헌신했으므로 그들은 두 개의 몸 안에 있는 하나의 지바였습니다. 그들은 많은 공통된 관심사를 공유했으며, 쾌락의 정원에서 함께 놀았습니다. 태양이 햇빛을 비추어 연꽃을 피게 하듯이, 왕은 사랑하는 왕비에게 그의 사랑을 듬뿍 쏟아 그녀를 모든 면에서 즐겁게 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지식과 지혜를 서로 공유한 결과, 두 사람은 지식의 모든 분야에서 매우 박식하게 되었습니다. 각자가 온통 밝은 빛으로 상대의 가슴속에서 살았습니다. 사실상, 그것은 마치 비슈누 신과 그의 배우자가 특별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지상에 내려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쉬키드바자와 추달라는 한 순간의 무미건조함도 없이 여러 해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무도 시간의 흐름을 멎게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요술쟁이의 속임수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쾌락은 그것을 추구하면,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갑니다. 슬픔은 마치 독수리가 죽은 시체를 먹이로 하듯이 마음을 잡아먹습니다. "마음이 두 번 다시 슬픔을 겪지 않는 상태에 도달한 뒤에는 이 세상에 무엇이 있을까?" 이렇게 곰곰이 생각하면서, 왕과 왕비는 그들의 관심을 영적인 경전을 연구하는 쪽으로 돌렸습니다.

그들은 참나 지식만이 슬픔을 극복시켜 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마음과 영혼을 다해 참나 지식에 몸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참나 지식을 가진 현자들과 같이 지내며, 그들을 흠모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참나 지식을 토론했고, 서로서로 참나 지식을 증진시켜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참나 지식의 방법을 숙고한 뒤에, 왕비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을 보며, '내가 누구지?'라고 물어본다. 그러면 참나에 대한 무지와 망상이 일어날 수가 없구나. 물질적인 몸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고, 또 그 몸이 참나가 아닌 것도 틀림없다. 그 몸은 오직 마음속의 생각이 움직이기 때문에 경험되는구나. 활동 기관들도 단지 몸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 기관들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역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감각 기관들도 역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심지어 마음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은 생각을 하고 개념을 품지만, 그것도 결정의 동인인 지성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이끌린 것이다. 심지어 이 지성(붓디)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아감의 지시를 받기 때문이다. 이 자아감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유령이 무지한 아이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과 꼭 같이, 지바에 의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바는 단지 순수 의식이 말하자면 생명력의 옷을 입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 지바는 가슴속에 거주한다.

자, 보라! 나는 지바로서 거주하는 것이 순수 의식인 참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의식은 그 자체를 그 자체의 대상으로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상은 지각력이 없고 비실재적이다. 그리고 참나가 그 자체를 이 대상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것은 의식으로서의 그 본성을 버리고 무지각이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이 의식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즉 의식은 그것이 생각하는 어떤 것이 실제적이든 가상적이든 간에, 그 자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이미 그 자체의 본성을 버렸기 때문에 그 생각하는 대로 된다. 따라서 비록 참나는 순수 의식이지만, 그것은 그것이 대상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를 지각력이 없고 비실재적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당히 오랫동안 깊은 생각을 한 뒤에, 추달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렇게 참나를 발견하고 기쁜 나머지, 왕비는 다음과 같이 소리쳐 말했습니다. "마침내 나는 마땅히 얻어야(알아야) 할 것을 얻었다. 이제 어떤 손실도 없다. 마음과 감각들은 의식과 관계가 없는 비실재적인 것이며, 그것들은 단지 의식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 지고의 의식만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어떠한 불순물에도 물들지 않고, 영원히 완전한 균형 상태에 있으며, 자아감이 전혀 없는 지고의 진리이다. 일단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것은 영원히 지지 않는 태양처럼 빛난다.

브람만이나 지고의 참나 등의 다양한 이름들로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이 의식이다. 거기에는 주체와 객체의 구별도 없고, 그들의 관계(지식)도 없다. 의식은 그 자체의 의식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달리(의식의 대상으로서) 깨달아질 수 없다. 마음과 지성과 감각으로서 명백히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 의식뿐이다. 이 현상계도 단지 의식에 불과하므로 그 의식과 별도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은 어떤 변화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유일한 분명한 변화는 가공의 현상이다. 현상은 가곡적이고, 그러므로 실재하지 않는다. 가상의 바다에서 가상의 파도들이 일어난다. 마음이란 물질 그 자체는 바다이고, 파도들 또한 마음의 물질이다. 그와 꼭 같이 현상계는 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그러므로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나는 자아감이 전혀 없고, 만물에 충만해 있는 순수 의식이다. 이 의식 속에는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다. 그것은 소멸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간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칼로 자를 수도 없고, 불에 태울 수도 없다. 그것은 결함이 전혀 없는 순수한 의식의 빛이다.

나는 모든 망상에서 벗어났다. 나는 평화롭다. 이 모든 신들과 악마들과 수많은 존재들은 본질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점토로 만들어진 병정들이 병정이 아니고 점토이듯이, 현상은 환영이다.

보는 자(주체)와 보이는 대상(객체)은 실제로 하나의 순수 의식이다. '이것은 일원성이다.', '이원성이 있다.'와 같은 개념들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망상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 망상이 누구에게 존재하는가? 그 망상은 누구의 것인가?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지각력이 있든 없든)이 순수 의식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최소한의 심적인 동요도 없이 니르바나(해방이나 깨달음)에 조용히 머물고 있다. '이것'도 없고, '나'도 없고, '다른 것'도 없다. 존재도 없고 존재 아님도 없다. 이 모든 것이 평화다." 이와 같이 깨달았으므로, 추달라는 지고의 평화에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하루하루 왕비는 점점 더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 참나의 희열을 더욱 더 많이 향유했습니다. 그녀는 갈망과 애착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어떤 것도 버리지 않고, 또한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고, 그녀는 그녀의 거동에서 자연스러웠으며, 또한 그녀의 활동에서도 꾸민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모든 의심이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이미 변화의 바다를 건너 버렸습니다. 그녀는 비할 데 없는 평화로운 상태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그녀는 이 현상계가 생겨난 방식과 꼭 같이 또한 사라질 것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그녀는 참나 지식의 빛 속에서 밝게 빛났습니다.

이와 같이 평화롭고도 환하게 밝은 아내를 보고, 쉬키드바자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은 다시 젊음을 되찾은 것 같습니다. 당신은 특별히 밝은 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것에도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갈망도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희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신의 넥타를 마셨기 때문인지 나에게 말해 주십시오. 당신이 지극히 얻기 어려운 어떤 것을 얻은 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형태를 가장하고 있었던 이 텅 빔을 이미 버렸습니다. 나는 현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빛이 납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외의 다른 어떤 것 즉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의존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빛이 납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기도 하고, 또한 어떤 것이 아닌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빛이 납니다. 나는 마치 쾌락을 향유한 것처럼 그 쾌락을 향유하지 않음을 즐기고 있습니다. 나는 기쁨에도 굴하지 않고, 노여움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빛이 납니다. 나는 나의 가슴속에서 빛나는 실재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데서 최고의 기쁨을 경험합니다. 나는 왕실의 쾌락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빛이 납니다. 내가 쾌락의 정원에 있을 때도, 나는 쾌락의 향유나 수치심 등이 아닌, 참나 속에 흔들림 없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빛이 납니다.

나는 우주의 통치자입니다. 나는 유한한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참나를 즐깁니다. 그러므로 나는 빛이 납니다. 이것이 나입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나는 존재하며,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전부입니다. 또한 나는 무(無)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빛이 납니다. 나는 쾌락도, 부도, 빈곤도, 또한 어떤 다른 형태의 존재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애쓰지 않고 얻어지는 것이면, 그 무엇에도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빛이 납니다. 나는 경전을 통해 얻은 통찰력을 가지고, 약해진 애착과 혐오를 가지고 놉니다. 그러므로 나는 빛이 납니다. 내가 이 두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간에, 이 감각으로 무엇을 경험하든지 간에, 그리고 나의 마음을 통해 무엇을 바라보든지 간에, 나는 오로지 나 자신의 내부에서 나에 의해 명확히 보여지는 하나의 진리만을 봅니다.

왕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쉬키드바자는 비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은 유치하고 무지합니다.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를 대가로 중요한 것을 버렸는데도, 다시 말해 참된 실체를 버리고 무의 상태를 얻었는데도, 어떻게 당신은 환하게 빛납니까? 화난 남자가 침실을 거부하듯이, 만약 사람이 "나는 향유될 수 없는 기쁨을 즐긴다."라고 자랑하면서 쾌락을 포기한다면, 그것이 즐거움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사람이 모든 것(쾌락 등)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청 빔을 즐긴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이 옷과 음식과 침대 등을 버린 뒤에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습니다. '나는 몸이 아니다.', '또한 나는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어떤 것도 전부가 아니다.' 등과 같은 이런 말들은 순전히 쓸데없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내가 보는 것을 보지 않고.', '나는 그 밖의 다른 것을 본다.'라는 말들도 쓸데없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금도 신경 쓰지 마시고, 당신에게 주어지는 쾌락을 향유하십시오. 나는 계속 당신과 놀 것입니다. 당신도 마음껏 즐기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왕은 이렇게 말한 뒤에, 안방에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추달라는 "왕께서 이해하지 못하시니 애석한 일이로구나."라고 생각하며, 계속 그녀의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상당한 시간 동안 계속 살았습니다. 비록 추달라에게는 욕망이 없었지만, 우주 속을 돌아다니고 싶은 소망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힘을 얻기 위하여 그녀는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거기서 위로 올라가는 경향성을 가진 생명의 기를 단련시켰습니다.

오, 라마여!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유형의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있습니다. 즉, 바람직한 목표와 혐오스러운 목표, 그리고 무시해도 좋은 목표입니다. 바람직한 것은 큰 노력을 기울여 찾아야 하고, 혐오스러운 것은 포기해야 하며, 이들 둘 사이에 있는 것은 사람이 무관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반대를 바림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행복이나 불행 그 어느 것도 가져다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이들 범주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하나의 단순한 놀이로 간주하고, 그러므로 그들은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 참나 지식을 갖춘 현자가 무관심을 보이고, 현혹된 자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참나 지식의 계발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 몹시 회피하고 싶어 하는 그런 목표(싯디, 즉 영적인 힘)를 달성하는 방법을 기술하겠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모든 목적의 달성은 시간과 장소와 활동과 수단이라는 네 가지 요소에 달려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서도 활동이나 노력이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적 달성을 향한 모든 시도가 활동이나 노력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된 수행들도 또한 널리 유행하고 있어, 그들이 목적 달성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한 수행이 특히 미숙한 수행자들의 수중에 들어가면, 그 수행은 큰 해를 입히는 원인이 됩니다. 이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는 보석이나 약물의 사용, 고행과 마법에서 쓰는 주문의사용은 물론이고, 마법의 알약이나 고약 혹은 요술 지팡이 등이 있습니다. 슈리샤일라나 혹은 메루와 같은 신성한 장소에 단순히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영적으로 완벽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지만, 이것 또한 잘못됐습니다.

그러므로 쉬키드바자의 이야기 문맥 속에서, 나는 쁘라나야마 즉 생명력을 단련시키는 기법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목적 달성에 대해 기술하겠습니다. 부디 경청해 주십시오.

준비 단계에서, 사람은 자신이 성취하고 싶어 하는 것과 관련이 없는 모든 습관과 경향성들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신체의 모든 구멍을 폐쇄하는 법과 또한 여러 가지 상이한 자세의 숙련을 배워야 합니다. 음식은 순수해야 합니다. 성스러운 경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올바른 행동과 성자들과의 교제는 필수적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했으므로, 사람은 편안하게 앉아야 합니다. 그 다음 분노나 탐욕 등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면서 얼마 동안 쁘라나야마를 수련하면, 그는 생명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지구의 통치에서부터 완전한 해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생명력의 움직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모든 목적의 달성은 쁘라나야마의 수련을 통해 가능합니다.

신체의 깊은 내부에는 안뜨라베스띠까라고 하는 나디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주요 급소에 있으며, 다른 100개의 나디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들, 악마들, 인간들, 동물들, 새들, 벌레들, 물고기들 등 모든 존재에게 존재합니다. 그것은 그 근원이 코일처럼 감겨 있습니다. 그것은 허리에서부터 머리의 정수리까지 신체의 모든 통로와 접촉하고 있습니다.

이 나디 안에 지고의 힘이 내재해 있습니다. 그것은 꾼달리니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양이 코일처럼 감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 속에 있는 지고의 힘이며, 모든 힘의 원동력입니다. 가슴속에 있는 쁘라나 즉 생명력이 꾼달리니의 거처에 도달하면, 그 사람의 내부에서 자연의 원소들에 대한 자각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내부에서 자각이 있다는 것은 바로 그 꾼달리니가 퍼지면서 움직이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나디들은 방사선 형태로 퍼지는 에너지 흐름, 말하자면 그 꾼달리니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꾼달리니는 의식과 이해, 혹은 지식의 씨앗 그 자체입니다.

라마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무한한 의식은 영원히 분할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꾼달리니는 어떻게 일어나고 나타나게 되어, 결국 이 의식을 드러냅니까?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실제로, 무한한 의식만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저기에서 원소들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태양은 모든 것에 빛을 비추지만, 그 빛이 거울에 닿으면 그것은 특별하게 반사됩니다. 마찬가지로, 똑같은 무한한 의식도 어떤 것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것에서는 분명히 나타나게 되며, 또 다른 어떤 것들에서는 그 화려함이 절정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공간이 어디에서나 텅 빈 공간인 것처럼, 의식도 그것이 어떻게 나타날지라도 의식이지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변화도 겪지 않습니다. 이 의식 그 자체는 다섯 개의 근본 원소들입니다. 그대는 마치 하나의 등불을 가지고 백 개의 등불을 보는 것과 꼭 같이, 마치 그대가 그대 자신 안에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대는 그대의 의식으로 다섯 개의 근본 원소들인 같은 의식을 바라봅니다.

약간의 생각의 움직임만 있어도 그것 때문에 의식이라는 꼭 같은 실재가 다섯 개의 원소들이 되고, 그 때문에 몸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똑같은 의식이 벌레들과 기타 생물들, 금속들과 광물들, 땅과 그 위에 있는 것, 그리고 물과 기타 원소들이 됩니다. 따라서 온 세상은 단지 다섯 개의 원소들로 나타나는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음직임에 불과합니다. 마치 물이 찬 바람에 노출되면 굳어지고 고체가 되는 것과 꼭 같이, 이 에너지도 어디에서는 지각력이 있고 또 다른 어디에서는 지각력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연은 이와 같이 형성되고, 모든 사물은 자연에 순응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말의 유희 즉 말의 멋진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더위와 추위, 얼음과 불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또, 이러한 구분이 일어나는 원인은 조건화와 사고의 틀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그러한 조건화의 성격이 숨어 있든, 겉으로 드러나 있든, 선하든 악하든 간에, 그 성격을 탐구합니다. 이러한 것이 실속 있는 탐구입니다. 허울 좋은 토론은 공간과 싸우는 것만큼이나 무익합니다.

잠재적인 조건화는 지각력이 없는 존재들을 낳고, 겉으로 드러난 조건화는 신들이나 인간 등을 낳습니다. 어떤 것에는 무지의 원인이 되는 강한 조건화가 있고, 또 어떤 것에는 해방으 원인이 되는 약한 조건화가 있습니다. 오직 그 조건화만이 창조물들의 다양성이 존재하게 된 원인입니다.

창조라고 하는 이 우주적 나무로 말하면, 최초의 생각의 형태는, 나무의 다양한 부분들에는 다양한 천체들이 있고, 그 나무의 열매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 씨앗입니다. 나무를 만드는 다섯 개의 원소들은 저절로 일어났다가 저절로 사라집니다. 그것들은 저절로 다양해졌다가, 오래지 않아 하나로 되어 고요해집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꾼달리니는 다섯 원소로 구성된 몸 안에서 생명력의 형태로 기능을 합니다. 조건화 혹은 한계, 마음, 지바, 생각의 움직임, 지성 (또는 결정하는 능력) 그리고 자아감이라고 다양하게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똑같은 꾼달리니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몸 안에 있는 지고의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아빠나로서 그것은 항상 아래로 흐르고, 사마나로서 그것은 태양 신경총 안에 있으며, 그리고 우다나로서 똑같은 생명력이 위로 올라갑니다. 이러한 힘들 때문에 인체 내의 균형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래로 당기는 힘이 과다하고 그 내려가는 힘이 적절한 노력으로 정지되지 않으면, 죽음이 잇따릅니다. 마찬가지로, 위로 당시는 힘이 과다하고 그것이 적절한 노력으로 정지되지 않으면, 역시 죽음이 잇따릅니다. 만약 생명력의 움직임이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는 식으로 다스려진다면, 끊임없는 균형 상태가 있고 모든 질병이 극복됩니다. 이와 달리 만약 보통의 부차적인 나디들의 기능 장애가 있으면, 사람은 사소한 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그리고 만약 중요한 나디들에 기능 장애가 있으면, 중병이 생기게 됩니다.

라마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비야디(질병)들은 무엇이고, 아디(정신 질환)들은 무엇이며, 신체의 퇴화 조건은 무엇입니까? 부디 이 점에 대해 깨우침을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아디와 비야디는 슬픔의 원천입니다. 그것들을 피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해방입니다. 때때로 그것들은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서로를 일으키기도 하며, 또 때로는 서로 서로를 따르기도 합니다. 신체적 질병을 비야디라고 합니다. 심리적인 조건화로 야기되는 정신적 혼란(신경증)을 아디라고 합니다. 이 둘의 근본적 원인은 모두 무지와 사악함에 있습니다. 참나 지식이나 진리에 대한 지식이 얻어지면 그것들은 사라집니다.

사람이 무지하면 자기 통제력의 부재가 생기고, 그래서 그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나는 이것을 얻었으나, 저것도 얻어야겠다.'와 같은 생각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망상을 강화시켜 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정신적 혼란의 원인이 됩니다.

신체적 질환들의 원인은 무지와 또 거기에 따르는 부절적한 식사 및 생활 습관을 초래하는 정신적 억제력의 완전한 부재입니다. 기타의 원인들로는 때를 잘 지키지 않는 불규칙한 활동이나 불건전한 습관, 나쁜 친구, 사악한 생각 등이 있습니다. 신체적 질환은 또한 나디가 약화되든지, 아니면 나디가 혼란해지고 막힘으로써 생명력의 자유로운 흐름이 방해받을 때 일어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체적 질환의 원인은 비위생적인 환경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가까운 과거나 아니면 먼 과거에 행해진 과거의 업에 의해 결정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 모든 정신적 혼란과 신체적 질환은 다섯 가지의 원소들에서부터 일어납니다. 나는 이제 그것들이 없어지게 되는지를 말해 주겠습니다. 신체적 질환은 일상적인 질환과 심각한 질환, 이 두 가지입니다. 전자는 일상적인 원인에 의해 일어나고, 후자는 선천적인 질병입니다. 전자는 일상적인 치료 수단에 의해서와, 올바른 심적 태도를 채택함으로써 치료됩니다. 그러나 정신적 혼란 같은 후자의 (심각한) 질환은 참나 지식을 얻을 때까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는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볼 때, 그 뱀이 사라지는 것은 오직 밧줄이 다시 밧줄로 보일 때만 가능한 것과 같습니다. 참나 지식은 모든 신체적, 정신적 혼란들을 종식시킵니다. 그러나 정신 작용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신체적 질환은 약물 치료나 기도 및 목욕과 같은 바른 행동에 의해 치료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까지 의학 저서에서 기술되었던 것입니다.

라마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신체적 질환이 어떻게 정신적 혼란에서 일어나며, 또 그것이 의학적인 치료 수단 이외의 다른 수단들에 의해 어떻게 치료될 수 있는지를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정신적 혼란이 있을 때, 사람은 자신의 길을 명확히 작가하지 못합니다. 자기 앞의 길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는 틀린 길을 선택합니다. 여러 생명력은 이 혼란에 동요되어 아무렇게나 나디를 따라 흘러갑니다. 그 결과 어떤 나디는 에너지가 고갈되고, 또 어떤 나디는 막히게 됩니다.

그때 소화 계통의 기능 장애, 신진대사의 혼란, 소화 불량, 지나친 식욕 같은 것들이 일어납니다. 먹은 음식은 독소로 변합니다. 체내에서 음식물의 자연그러운 이동이 정지됩니다. 이것이 다양한 신체적 질환의 원인입니다.

따라서 정신적 혼란은 신체적 질환의 원인이 됩니다. 마치 미로발란 과일이 내장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과 꼭 같이, '야, 라, 라, 바'와 같은 어떤 만뜨라들은 정신신체적 질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기타 치료 수단으로는 순수하고 상서로운 활동이나 성인들에 대한 봉사 등이 있습니다. 이들에 의하여 마음은 순수해지며, 가슴속에는 큰 기쁨이 솟아납니다. 여러 생명력은 마땅히 나디를 따라 자연그럽게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면 소화도 정상이 되고 질병도 멎게 됩니다.

뿌라까 즉 숨 들이마시기의 수행에 의하여, 만약 척추의 기저에 있는 꾼달리니가 '채워'지고 균형 상태에 이르게 되면, 몸은 견고한 채로 있습니다. 호흡의 보유를 통해 모든 나디들이 따뜻해지면, 꾼달리니는 막대기처럼 일어나고 그 에너지는 신체의 모든 나디에 가득 차게 됩니다. 이 때문에 나디는 정화되고 가벼워집니다. 그러면 요기들은 공간 속을 여행할 수 있습니다. 브람마나디를 통해 꾼달리니가 일어나서, 레차까 즉 숨을 내쉬는 동안에 드바다샨따(머리 정수리로부터 손가락 12개의 폭만큼 떨어진 곳)라고 하는 지점에 도달할 때, 만약 그 꾼달리니를 거기에서 한 시간 동안 붙잡아 둘 수 있다면, 요기는 신들을 볼 수 있고 또 공간 속을 여행하는 완전한 경지에 도달한 존재들도 볼 수 있습니다.

라마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인간이 두 눈으로 천인들을 보는 것이 가능합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제로 어떤 인간도 인간의 두 눈으로는 천인들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지성의 눈을 통하여 사람은 꿈 속에서처럼 천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천인들은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천인에 대한 비전은 꿈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상 그 둘 사이에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그 비전의 효과가 지속적이라는 것입니다. 또 만약 사람이 숨을 내쉰 뒤에 상당한 시간 동안 생명력을 드바다샨따(몸에서 손가락 12개 폭만큼 떨어진 곳)에 붙들어 둘 수 있다면, 그 생명력은 다른 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힘은 본래 생명력 속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본래 불안정하지만, 그것은 안정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덮고 있는 무지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예외는 이 세상에서 흔히 에너지의 움직임에서 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이 모든 것은 정말로 브람만입니다. 다양성과 다양한 작용은 단지 말의 멋진 표현에 불과합니다.

라마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사람의 몸이 미세한 공간(나디) 속으로 들어간 다음에 그 내면의 공간을 생명력으로 채우려면, 그것은 원자이면서 동시에 고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목재와 톱이 맞닿으면, 목재는 쪼개집니다. 그러나 두 개의 나무 조각이 맞닿으면, 불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 자연의 역할입니다.

*이 신체 속에는 두 개의 힘이 복부에서 만납니다. 그것들은 함께 하나의 속이 빈 막대기를 만듭니다. 그 안에 꾼달리니가 있습니다. 이 꾼달리니는 천국과 지구의 중간에 있고, 생명력으로 항상 진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슴속에 거주할 때, 그것은 모든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이킥 센터들을 끊임없이 진동하거나 움직이게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소화시키거나 먹어 삼킵니다. 그것은 쁘라나의 움직임에 의해 사이킥 센터들을 떨게 합니다. 그것은 모든 정수가 고갈될 때까지 몸 안의 불을 계속 지핍니다.

(*이 단락에 나오는 '그것'은 위장의 불, 생명력, 또는 심지어 꾼달리니를 가리킬 수도 있다. 바시슈타는 이러한 구분을 아주 열심히 하지도 않고, 또 그런 구분을 계속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본래 그것은 차갑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몸이 따뜻해집니다. 비록 그것은 요기가 명상하는 곳인 가슴속에 있지만, 몸 전체에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냐나(지식)의 속성을 띠고 있고, 그것의 빛을 받으면 먼 대상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차가운 것은 무엇이든지 달, 참나입니다. 이 달에서부터 불이 일어납니다. 몸은 이 달과 이 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상 온 세상이 차가운 달과 따뜻한 불이라는 이 두 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혹은 그대는 이 세상이 지식과 무지의 세상, 실재와 비실재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 어느 경우이건 의식, 빛 그리고 지식은 태양이나 불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움직이지 못함과 어둠과 무지는 달로서 간주됩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불과 달은 몸 안에서 서로 인과 관계로 존재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것들의 관계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탄생시키기 때문에 씨앗과 나무의 관계와 같습니다. 또 어떤 점에서, 그것들의 관계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소멸시키는 빛과 어둠의 관계와 같습니다. ("욕망의 동기가 전혀 없으므로 그러한 인과 관계와 그러한 활동은 비논리적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모든 것에 의문을 지닌 사람은 재빨리 가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활동은 명백하고, 모든 것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불) 쁘라나는 차가운 달의 입으로 시원한 감로를 마시고, 몸 안의 전 공간을 채웁니다. (감로가 입안 구개로부터 흘러나오고, 태양 신경총에서 위장의 불이 그것을 죄다 먹어 치운다는 것이 요기의 이론이다. 따라서 차가운 달은 타고 있는 불의 원인이다. 그래서 요기는 이러한 감로의 손실을 막기 위하여 비빠리따까라니 수행법을 사용하고 있다. S.V.) 마치 날이 저물어 밤이 시작되는 것과 꼭 같이, 불은 사그라지고 달이 됩니다.

불과 달이 만나는 지점에, 빛과 어둠이 만나는 지점에, 그리고 밤과 낮이 만나는 지점에, 심지어 현명한 사람들의 이해력으로도 알 수 없는 진리의 계시가 있습니다.

하루가 낮과 밤으로 되어 있는 것과 같이, 지바도 의식과 둔함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과 태양은 의식을 상징하고, 달은 어둠이나 둔함을 상징합니다. 태양이 하늘에 떠 있을 때 어둠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과 꼭 같이, 의식의 빛이 떠 있을 때 무지의 어둠과 생셩의 주기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만약 달(무지나 둔함의 어둠)이 달 본래의 모습으로 보여진다면, 의식은 유일한 진리로서 실현됩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의식의 빛입니다. 의식은 움직이지도 않고 비이원적이기 때문에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의 반사물인 몸을 통하여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의식이 그 스스로를 자각하게 될 때, 그것은 세상을 자기 편으로 만듭니다. 이러한 객관화를 버릴 때, 해방이 있습니다. 쁘라나는 열(불)이고, 아빠나는 차가운 달입니다. 그래서 이 둘은 같은 몸 안에서 빛과 그림자처럼 존재합니다. 앞서 설명한 의식의 빛과 달이 다 함께 합쳐져서 경험이 생겨납니다. 태양과 달이라고 하는 현상은 이 세상이 창조되던 때부터 존재했지만, 지금도 또한 몸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 라마여! 태양이 그 자체 속으로 달을 흡수한 상태로 계십시오. 달이 가슴속에서 태양과 하나가 된 상태로 계십시오. 달이 태양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 있는 상태로 계십시오. 그대 자신 안에서 태양과 달이 결합해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왜부의 현상은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 요기들이 어떻게 그들의 몸을 크게는 물론, 원자처럼 작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해 주겠습니다.

불꽃 하나가 바로 가슴 연꽃 위에서 타고 있습니다. 이 불은 재빨리 증대하지만, 그것이 의식의 본성을 띠고 있으므로 지식의 빛으로서 일어납니다. 이렇게 그것이 한 순간에 커지면, 그것은 몸 전체를 용해시킬 수 있습니다. 심지어 몸 안에 있는 물의 원소마저 그 열로 증발되고 맙니다. 그 다음 그것은 두 개의 몸(신체적 몸과 미묘한 몸)을 버렸으므로, 그것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꾼달리니의 힘이 불에서 연기처럼 피어올라, 공간 속으로 흡수된 것입니다. 만약 이 꾼달리니가 마음, 붓디 그리고 자아감을 꽉 붙들면, 그것은 먼지의 입자처럼 밝게 빛납니다. 그러면 이 불꽃이나 이 입자는 어떤 것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이 꾼달리니는 이전에 그 자체 속으로 흡수되었던 물과 흙의 원소들을 내놓고 그리고 몸은 그 원래의 형태를 회복합니다. 이와 같이, 지바는 원자처럼 작게 될 수도 있고, 산처럼 거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와 같이 그대에게 지금까지 요가의 방법을 설명했고, 이제 지혜의 접근 방법을 다루겠습니다.

오직 하나의 의식만이 있는데, 그것은 순수하고, 보이지 않으며, 미묘한 것 중에서도 가장 미묘하고, 평온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도 아니고 또한 세상의 활동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 자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바라는 것이 생깁니다. 이 지바는 실재하지 않는 이 몸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바가 참나 지식의 빛으로 그것을 자각할 때, 이 망상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몸도 또한 완전히 평온해집니다. 그러면 지바는 몸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몸과 참나를 혼동하는 것은 태양의 빛으로도 사라지게 할 수 없는 최대의 망상입니다.

몸이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면, 그것은 실재하는 몸이 됩니다. 지식을 가지고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자각하면, 그것은 공간 속으로 흡수되고 맙니다. 몸에 대해서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개념이 무엇이든 간에, 몸은 그 개념대로 됩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숨 내쉬기의 수련인데, 그 수련을 통해 지바는 꾼달리니의 거처로부터 올라와 이 몸을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통나무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때 지바는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다른 어떤 몸 안으로도 들어갈 수 있고, 바라는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바가 그 경험을 얻은 뒤에는 자기 뜻대로, 또 하고 싶을 때에, 이전의 몸이나 다른 어떤 몸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것은 어떤 특별한 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만물에 충만해 있는 의식으로서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추달라 왕비는 모든 영적인 힘(자기 자신을 원자처럼 작게 만들거나 아주 거대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처럼)들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 곁을 떠나지 않고서, 하늘을 왔다 갔다 했으며, 가장 깊은 바다 속으로도 들어갔으며, 그리고 지구를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녀는 어떠한 방해도 없이 나무나 바위, 산, 풀, 하늘 그리고 물과 같은 모든 형태의 물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천인들과 함께, 그리고 해방을 얻은 현자들과 함께 다녔으며, 그들과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자기의 남편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그는 아무 반응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어리석음을 비웃었습니다. 그는 무지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영적인 힘들을 남편에게 보여 주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느꼈습니다.

라마는 물었다.

추달라와 같은 그렇게 위대한 싯다 요기니조차 쉬키드바자 왕의 영적인 각성과 깨달음을 가져오게 할 수 없다면, 도대체 일반 사람은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것은 단지 하나의 전통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깨달음을 일으키는 원인은 오직 제자의 순수 의식에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거나 올바른 활동을 함으로써도 사람은 참나 지식을 얻지 못합니다. 오직 참나만이 참나를 알고, 오직 뱀만이 자기의 발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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