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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uism/요가 바시슈타

어리석은 코끼리의 이야기

by Yuneelif 2018. 6. 25.

브람마나(추달라)는 계속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역시 당신의 이야기와 꼭 닮은 또 하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빈댜 숲 속에 힘이 매우 세고, 또 튼튼하고 강한 엄니를 가진 코끼리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코끼리를 타는 주인은 그 코끼리를 우리에다 가두어 두었습니다. 게다가 코끼리 주인이 막대기와 같은 무기를 계속 사용했으므로, 코끼리는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주인이 없는 사이, 코끼리는 우리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 같은 노력은 꼬박 3일간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코끼리는 우리를 부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때 코끼리 주인이 코끼리의 소행을 보았습니다. 코끼리가 도망을 치려고 하는 동안 주인은 나무에 올라갔고, 거기에서 그는 몸을 던져 코끼리 등에 타서 다시 코끼리를 제압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무에서 뛰어내릴 때, 그는 코끼리의 머리에 착지하지 못하고 코끼리의 머리 바로 앞에 떨어졌습니다. 코끼리는 자기 앞에 떨어진 적(주인)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코끼리는 측은한 마음에 압도당하여 그 주인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동정심은 심시어 짐승에게도 볼 수 있습니다. 코끼리는 그냥 도망쳤습니다.

주인은 심한 부상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악인의 몸은 쉽게 부서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들의 악행은 오히려 그들의 몸을 강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코끼리 주인은 코끼리를 잃어버리자 불행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코끼리를 찾기 위해 숲을 계속 수색했습니다. 매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그 코끼리가 우거진 숲 속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코끼리를 다시 포획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다른 코끼리 조련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도움으로 거대한 함정을 파고 그것을 나뭇잎으로 덮어 두었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자, 그 거대한 코끼리는 그 함정에 빠졌습니다. 이렇게 사악한 주인에 의해 다시 붙잡혀 결박당한 코끼리는 아직도 거기에 서 있지 않겠습니까?

코끼리는 자기의 원수가 자기 바로 앞에 떨어졌지만 그를 죽이지 않고 그냥 놔두었었지요. 그 때문에 그 코끼리는 다시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적절하게 활동하지 못함으로써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지 못하는 사람은 슬픔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나는 자유롭다.'는 잘못된 만족으로 인하여, 코끼리는 다시 속박당하게 된 것입니다. 어리석음이 슬픔을 자초한 꼴입니다. 어리석음은 굴레입니다. 오, 신성한 현자시여! 속박당한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삼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단지 참나에 지나지 않지만, 어리석음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단지 어리석음의 확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거룩한 현자시여! 이 두 이야기의 의미를 설명해 주십시오.

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천상의 보석을 찾아 나선 부유하고 박식한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은 경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돌이 물 속에서 쉬는 것처럼 자신 내부에서 편히 쉬고 있지 않습니다. 찐따마니는 모든 슬픔을 종식시켜 주는,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포기입니다. 순수하고 완전하게 포기를 할 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비교해 보며느 천상의 보석이란 무엇입니까? 당신은 제국 등을 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완전한 포기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뒤에 당신은 이 외딴 곳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포기해야 할 것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자아감입니다. 만약 가슴이 생각의 움직임인 마음을 버린다면, 절대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이 옵니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의 포기가 자신에게 불러 일으킨 포기라는 생각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완전한 포기에서 일어나는 희열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은 어떤 것정에 의해서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 수 있다면, 그 바람이 움직일 수 없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걱정들이나 혹은 생각의 움직임들만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 개념, 관념은 똑같은 것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에 불과합니다. 만일 생각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면, 어떻게 마음을 포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생각이나 걱정 등으로 동요되면, 삼계가 즉시 마음에 나타납니다. 생각이 여전히 마음에 있는 한, 어떻게 순수하고 완전한 포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러한 생각이 가슴속에서 일어날 때, 당신의 포기는 찐따마니가 그 사람을 떠나는 것처럼 당신의 가슴을 떠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포기의 정신을 알아보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당신을 떠난 것입니다. 그것은 떠나면서 당신이 생각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도 가져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당신이 보석(완전한 포기의 정신)에 의해 버림을 받고 있을 때, 당신은 유리 조각(고행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주운 것입니다. 당신은 망상 때문에 그것을 소중히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아! 슬프게도, 당신은 무조건적이고 무집착의 무한한 의식을 버리고, 대신 당신 자신의 슬픔을 위해 시작과 끝이 있는 무익한 금욕 생활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무한한 기쁨을 버리고, 불가능한 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완고한 바보임에 틀림없으며, 자살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이 숲 속 생활이라는 함정에 빠져 완전한 포기의 정신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왕국과 그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한 속박을 버렸지만, 금욕 생활이라고 하는 것에 다시 속박당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추위와 더위, 바람 따위로 인하여 이전보다도 훨씬 더 걱정이 많고, 그러므로 더욱 단단히 속박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찐따마니를 얻었다."라고 어리석게 생각하면서, 당신은 실제로 수정 한 조각조차 얻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상이 첫 번째 우화의 의미입니다.

브람마나(추달라)는 계속 말했습니다.

자! 이제 두 번째 우화의 의미를 잘 들어 보십시오.

빈댜 언덕의 코끼리로서 묘사된 것은 당신이 이 지구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코끼리에게 난 두 개의 강력한 엄니는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비베까(분별, 지혜)와 바이라기야(초연)를 가리킵니다. 코끼리에게 고통을 주는 주인은 당신에게 슬픔을 일으키는 무지를 가리킵니다. 코끼리는 힘이 막강했지만 주인에게 제압당했습니다. 즉, 당신도 모든 면에서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이 무지나 어리석음에게 진 것입니다.

코끼리의 우리는 당신이 갇혀 있는 욕망의 우리를 가리킵니다. 그들 사이에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쇠로 된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부식되지만, 욕망의 우리는 시간과 함께 더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코끼리가 우리를 부수고 도망쳐 나왔듯이, 당신도 왕국을 버리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심리적인 것을 버리는 것은 물질적인 우리를 부수고 나오는 것만큼 쉽지가 않습니다.

코끼리 주인이 코끼리의 도망으로 경계 태세를 취했듯이, 포기의 정신이 그대 안에 나타날 때, 그대 안에 있던 무지와 어리석음은 두려워 벌벌 떨게 됩니다. 현명한 사람이 쾌락의 추구를 포기할 때, 무지는 그로부터 달아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숲 속으로 갔을 때, 당신은 이 무지에게 심한 상처를 입혔으나, 마치 코끼리가 그 주인을 죽이지 못한 것과 꼭 같이, 마음이나 의식 속의 에너지의 움직임을 버림으로써 그 무지를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지는 다시 일어났고, 당신이 이전의 욕망을 제압했던 방법을 기억해 내고, 그 무지는 다시 당신을 고행이라고 하는 함정에다 가두어 놓은 것입니다.

당신이 왕국을 포기하면서 단호히 이 무지를 완전히 소멸시켰더라면, 이 고행의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비베까 즉 지혜의 강력한 엄니를 갖고 있기 때문에 코끼리들의 왕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밀림에서 당신은 무지라고 하는 코끼리 주인의 덫에 걸려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고행이라는 보이지 않는 우물 속에 갇혀 있게 된 것입니다.

오, 왕이시여! 왜 당신은 정말로 진리를 알고 있는 당신의 아내 추달라의 현명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참나를 아는 사람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사람이며, 그녀의 말과 행동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이 진실이며, 실천에 옮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당신이 과거에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 말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왜 당신은 완전한 포기를 한다 해 놓고,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왕국과 궁전과 나라와 아내마저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부와 아내와 궁전과 왕국, 땅, 왕실의 보호물이나 당신의 친척들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버린다고 완전한 포기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것으로 보이는데도 당신이 아직 포기하지 못한 다른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포기의 가장 좋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그것을 완전히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슬픔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으십시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왕국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 숲과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쉬키드바자는 마음에서 숲 등을 포기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포기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라는 브람마나의 말을 듣자마자,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바로 지금까지 이 외딴 은둔처가 나의 모든 것이고, 나의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는 그것마저도 버리겠습니다. (이렇게 결심하고서, 쉬키드바자는 그의 가슴에서 그 은둔처가 자기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지워 버렸습니다.) 이제 내가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되풀이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도 또한 당신의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그것들을 포기합니까? 아직 당신이 포기하지 않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포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당신은 슬픔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것들 또한 내 것이 아니라면, 나는 내 지팡이와 사슴 가죽 따위와 내 오두막집도 버리겠습니다.

바시슈타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브람마나가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쉬키드바자는 오두막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긁어모아 거기에다 불을 지폈습니다. 그는 염주도 던져 버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뜨라를 반복적으로 암송하는 것이 신성하다는 망상에서 나는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그대(염주)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슴 가죽도 태워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물주전자(까만달루)를 브람마나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불 속으로 던져 넣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포기할 것이 있다면, 모조리 단호히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다시 한번 확대되고, 다시 한 번 모이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대 태워 버리겠다."

이렇게 결심을 한 뒤, 쉬키드바자는 이미 신성하고 세속적인 모든 활동들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으므로, 그가 그때까지 사용한 모든 물건들을 긁어모아 그들을 몽땅 다 태워 버렸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러고 나서, 쉬키드바자는 과거 자신의 잘못된 생각에 이끌려 불필요하게 지은 오두막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 다음, 그는 차례로 거기에 있던 모든 것과 남아 있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복을 포함해 모든 것을 태우거나 던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불을 피워 놓고 태워 버리는 바람에 심지어 동물들마저도 놀라서 그곳을 피해 멀리 도망갔습니다.

그때 쉬키드바자는 브람마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신의 아들이여! 나는 당신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어, 그렇게 오랫동안 내가 마음속에 지녀 온 모든 생각을 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순수하고 그지없이 행복한 지식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속박의 원인이 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내 마음은 등을 돌리고, 균형 속에 안주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나는 평화롭습니다. 나는 그지없는 희열을 느낍니다. 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공간이 나의 옷입니다. 공간이 나의 거처이고, 나는 공간과 같습니다. 오, 신의 아들이여! 이 지고의 포기 너머에 어떤 것이 있습니까?

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당신은 아직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마치 당신이 지고의 포기가 가져다주는 희열을 지금 즐기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말하자면, 당신은 아직 포기하지 못한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포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것까지 찌꺼기 하나 남김없이 완전히 버릴 때, 당신은 슬픔이 없는 지고의 상태에 도달할 것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뒤에,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신의 아들이여! 오직 하나가 더 남아 있군요. 그것은 감각이라고 하는 치명적인 뱀들의 거처이며, 피와 살 따위로 구성된 이 몸입니다. 이제 나는 그것마저 버리고 소멸시켜 완전한 포기를 성취하겠습니다.

그가 결심을 막 실행하려 할 때, 브람마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왜 당신은 이 죄 없는 몸을 헛되이 죽이려고 합니까? 송아지를 죽이려 하는 황소의 특징인 이 성냄을 버리십시오. 이 고행에 시달린 몸은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합니다. 당신은 그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몸을 파괴하려 하지 마십시오. 몸은 그 본성대로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상태로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힘이나 에너지에 의해 자극을 받아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몸은 쾌락이나 고통의 경험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습니다. 더욱이, 몸을 소멸시키는 것이 완전한 포기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그러한 포기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것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몸을 통해 작용하고 이 몸을 동요시키는 그것을 버릴 수 있다면, 당신은 진실로 모든 죄와 악을 버린 것이 되고 최고의 포기자가 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포기하면, 몸을 포함한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와 악은 비록 일시적으로 가려져 있을지 모라도, 또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것의 포기이며, 이 모든 것의 유일한 원인이며, 또한 이 모든 것이 거주하고 있는 그것만이 완전한 포기입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간청했습니다.

거룩한 분이시여! 포기해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를 제발 말씀해 주십시오.

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고귀한 분이시여! 그것은 ('지바'나 '쁘라나' 등의 이름으로도 통하는) 마음 또는 찌따라고 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며, 또한 '전부'이기도 한 혼란의 상태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혼란이 이 찌따(마음)이며, 그것은 인간이며, 그것은 세상이고, 그것은 전부입니다. 그것은 왕국과 몸과 아내와 기타 모든 것을 일으키는 씨앗입니다. 이 씨앗을 버릴 때, 현재에 존재해 있는 모든 것과 심지어 미래에 존재할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포기가 있는 것입니다.

선과 악, 왕국과 숲 등 이 모든 것은 찌따를 가진 사람의 가슴속에서는 고통을 일으키지만,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큰 기쁭을 일으킵니다. 마치 나무가 바람으로 흔들리는 것과 꼭 같이, 이 몸 또한 마음 때문에 흔글립니다. 존재들이 겪는 다양한 경험(노령과 죽음과 탄생 등)들과 또한 거룩한 현자들의 흔들리지 않는 마음 등 이 모든 것은 진실로 마음의 변화에 불과합니다. 붓디, 우주, 자아감, 쁘라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오직 이 마음뿐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버리는 것만이 완전한 포기입니다. 일단 그것을 버리면, 진리는 즉시 경험됩니다. 일원성과 다양성에 대한 모든 개념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평화가 도래합니다.

반면에, 당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당신은 당신 내부에 분리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면, 모든 것은 하나의 무한한 의식의 공(空) 안에 존재하게 됩니다. 연료 없는 등불처럼 완전한 포기라는 그 상태에 안주하면, 그는 연료 있는 등불처럼 더할 나위 없는 광채로 빛이 납니다. 왕국 등을 포기한 후에도, 당신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버린 뒤에도, 그 무한한 의식은 존재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앴을 때조차, 당신은 어떤 변화도 겪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당신이 마음을 완전히 버렸을 때라도,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린 사람은 노령과 죽음과 기타 그러한 인생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습니다. 그것만이 최고의 희열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굉장한 슬픔입니다. 옴(OM)! 따라서 이 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는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십시오. 그 완전한 포기 속에 최고의 지혜 즉 참나 지식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치 항아리가 완전히 비어야 그 안에 귀중한 보석을 저장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러한 완전한 포기를 통해서 석가모니(붓다)도 의심할 여지없이 그 상태에 도달하여 흔들림 없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므로 오, 왕이시여! 모든 것을 버렸을 때,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발견하는 그 모습 안에, 그 상태 안에 머무르십시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라는 생각조차 버리고, 지고의 평화 상태에 머물러 계십시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발 이 찌따(마음)의 정확한 본질과, 또한 다시는 그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것을 버리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바사나(기억, 과거의 미묘한 인상들, 조건화)가 이 찌따(마음)의 본질입니다. 사실상 그것들은 같은 말입니다. 그것을 버리거나 포기하는 일은 쉽고, 쉽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심지어 왕국을 다스리는 것보다 더 즐거우며, 꽃보다도 더 아름답습니다. 확실히 어리석은 사람이 마음을 버리는 것은 마치 우둔한 사람이 왕국을 다스리는 일이 어려운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매우 어렵습니다.

마음을 완전히 소멸시키거나 없애는 것은 삼사라(세상의 순환 주기)를 없애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또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생각의 씨앗을 가진 나무를 그 모든 가지와 열매와 잎과 함께 뿌리째 뽑아내십시오. 그리고 가슴속의 공간에 조용히 머물러 계십시오.

'나'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대한 지식(참나 지식)이 없을 때 일어납니다. 이 '나'라는 것이 마음이라고 하는 나무의 씨앗입니다. 그것은 마야라는 가공의 힘이 충만해 있는 지고의 참나라는 밭에서 자랍니다. 따라서 그 밭에서 하나의 분리가 생기고, 경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붓디라고 하는 결정하는 능력이 일어납니다. 물론 그것은 단지 그 씨앗의 확대된 모양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뚜렷한 형태가 없습니다. 그 본질은 개념화 즉 관념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마음, 지바 그리고 공이라고도 합니다.

이 나무의 줄기가 몸입니다. 나무 내에서 나무의 성장을 가져다주는 에너지의 움직임은 심리적인 조건화의 결과 때문입니다. 그 가지는 길어서 먼 거리까지 뻗어 있습니다. 그 가지는 존재와 비존재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유한한 감각 경험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열매는 선과 악(쾌락과 고통, 행복과 불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악한 나무입니다. 매 순간 그 가지들을 잘라 내고, 그것을 뿌리째 뽑도록 노력하십시오. 그 가지들도 또한 조건화와 개념들과 지각의 대상들을 그 본성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가지들은 이 모든 것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성(의식)의 힘을 통하여, 그것들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이들 바사나들은 크게 약화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무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 낼 수 있습니다. 그 가지를 없애는 것은 부차적입니다. 일차적인 것은 그 나무의 뿌리를 뽑는 것입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순수 의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순수 의식 안에서 어떻게 이 불순물(무지)이 일어났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참나도 아니면서 비실재적인 이 불순물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꿈바(브람마나-추달라)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 삼사라에 속박되어 있는 무지한 사람이 되는 원인인 그 불순물(무지)이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재하지 않는 것인지를 말씀해 보십시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 불순물은 또한 자아감이며, 찌따(마음)라는 이 큰 나무의 씨앗입니다. 나는 그것을 없애는 방법을 모릅니다. 내가 그것을 포기했는데도, 그것은 나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실재하는 원인에서 일어나는 결과는 언제 어디서나 자명한 것입니다. 원인이 실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 결과도 복시 현상에서 볼 수 있는 두 번째 달만큼이나 분명히 비실재적인 것입니다. 삼사라의 씨앗은 이미 자아감의 씨앗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지금 그 원인을 탐구해서 나에게 말씀해 보십시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나는 경험이 자아감의 원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없애는 방법을 나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아! 과연 당신은 결과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낼 수 있군요. 그러면 그러한 경험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나에세 말씀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그 원인을 없애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의식이란 것이 경험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경험이라는 대상일 때, 그리고 대상으로서의 경험이 일어날 어떤 원인도 없었을 때, 그 결과(경험)는 어떻게 일어났겠습니까?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몸과 같은 객관적인 실재 때문이 아닐까요? 나는 그러한 객관적인 실재가 어떻게 가짜로 보이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경험이 몸과 같은 대상들의 실재에 기초하고 있다면, 그러고 나서 몸 등이 비실재적인 것으로 드러난다면, 경험은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겠습니까? 원인이 없거나 실재하지 않을 때, 결과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결과의 경험도 망상입니다. 그렇다면 몸과 같은 대상들의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복시 현상에서 두 번째 달이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눈병이라는 원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임 여성의 아들도 우리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몸의 존재에 대한 원인은 아버지가 아니겠습니까?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렇다 치더라도,그 아버지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재하지 않는 것에서 태어난 것은 역시 실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최초의 창조주가 그 다음 나타나는 모든 몸들의 본래의 원인이라고 말한다면, 사실상 그것도 진실이 아닙니다. 창조주 그 자신은 실재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실재 이외의 다른(이 우주 등) 것으로 보이는 그의 외양은 착각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면, 무지와 자아감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창조주에서부터 기둥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이 실재하는 슬픔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대답했습니다.

현상계에 대한 이러한 망상은 그것을 반복하여 확인함으로써 확대됩니다. 그래서 물이 얼어 평평한 덩어리가 되면, 그것은 앉을 수 있는 의자 역할을 합니다. 오직 무지가 사라졌을 때만 사람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원래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다양성에 대한 자각이 감소되면, 이 삼사라에 대한 경험도 멈추게 되고, 당신은 당신 본래의 광채 속에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따라서 당신은 본래 지고의 존재입니다. 이 몸, 이 형상 등은 무지와 오해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창조주와 다양한 존재들의 창조에 대한 이 모든 개념은 실재하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결과를 실재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다양한 피조물들은 마치 신기루 속의 물과 같이, 단지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기만적인 현상은 그것을 탐구하면 곧바로 사라집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지고의 참나 즉 무한한 의식(브람만)이 그원인이며, 그 원인의 결과가 창조주라고 왜 말할 수 없습니까?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대답했습니다.

브람만이나 지고의 참나는 둘째가 없는 하나요, 원인도 없으며, 결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것을 해야 하거나, 어떤 것을 창조해야 할 어떤 이유(동기나 필요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행위자도 아니요, 또한 어떤 행위나 도구, 그런 행위를 할 씨앗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 우주나 창조주에 대한 원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주와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활동들의 행위자도 아니요, 또한 경험들의 향유자도 아닙니다. 당신은 전부이며, 항상 평화로우며, 태어나지도 않은 완벽한 존재입니다. 원인(창조의 이유)이 전혀 없기 때문에, 세상이라고 하는 결과도 전혀 없습니다. 현상계는 단지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객관성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일 때, 경험이란 무엇이며, 또 무엇에 관한 경험입니까? 경험이 전혀 없을 때는 경험자(자아감)도 없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순수하고 자유롭습니다. 굴레와 해방은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쉬키드바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시여! 나는 당신의 그 현명하고 논리 정연한 말씀을 듣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는 원인이 없기 때문에 브람만은 어떤 것의 행위자가 아니요, 또한 어떤 것의 창조자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마음도 없으며, 자아감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순수하며, 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는 나의 참나에 경이를 표합니다. 내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렇게 영적으로 깨달음을 얻은 뒤에, 쉬키드바자는 깊은 명상에 들어갔고,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장난삼아 그를 다시 명상에서 깨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당신은 이제 충분히 각성하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세상의 비전이 사라졌든 사라지지 않았든 간에, 지금 해야 할 일은 지금 해야만 합니다. 일단 참나의 빛을 보게 되면, 당신은 즉시 바람직하지 않은 것과 정신적 조건화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살아 있는 동안 해방을 얻은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이제 참나 지식으로 광채를 발하는 쉬키드바자는 브람마나 꿈바에게 '좀 더 깊은 이해력을 얻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실재가 하나의 분할할 수 없는 무한한 의식이라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과 봄으로 분명히 나누어지는 이 구별은 거기에서 어떻게 일어납니까?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좋은 질문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유일한 것입니다.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이 세상의 순환 주기가 끝날 때, 오직 빛도 아니요 어둠도 아닌 본질만 남겨 놓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은 무한한 순수 의식이며 지고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논리와 지성적인 이해를 초월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브람만이나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그것은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으며, 가장 큰 것보다 더 크며, 우수한 것 가운데서도 가장 우수한 것입니다. 그것과 관련해 보면, 지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원자와 같은 입자에 불과합니다!

나라는 의식으로 빛을 내는 것과 보편적인 참나인 그것은 바로 이 우주로서 존재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공기와 그 움직임 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없는 것처럼, 사실상 보편적인 참나와 이 우주 사이에도 어떤 진정한 구별도 없습니다. 파도들과 바다 사이에는 시간과 공간에 의한 어떤 인과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참나나 혹은 무한한 의식 속에서는 그러한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는  원인이 없는 것입니다. 그 무한한 의식 속에서 이 우주는 마치 작은 먼지의 입자처럼 떠다닙니다. 그 속에서 '세상'이라는 단어는 실체나 실재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것(무한한 의식)만이 여기에서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만물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의식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동시에 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할성과 이원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나만이 진리라는 것을 아는 것과, 이원성의 개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만이 모든 다양한 형상 속에 언제 어디서나 존재합니다. 그것은 볼 수도 없고(감각들과 마음을 통해 경험할 수도 없음), 또한 도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원인도 결과과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미묘합니다. 그것은 순수하게 경험하는 것(경험하는 사람도 아니요, 경험도 아님)입니다. 이와 같이 그것을 묘사하지만, 그것은 묘사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이 우주의 원인이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씨앗(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묘사할 수 없는 것은 또 다른 것의 원인이 아닙니다. 즉 거기에서는 어떤 것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나는 행위자도 아니요, 또한 행위나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절대적인 의식입니다. 그것이 참나 지식입니다. 지고의 브람만 속에는 어떤 세상도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시간(파도가 일어날 때의)과 공간(파도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의 토대 위에서 파도가 바다에서 일어나고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브람만과 이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그러한 관계조차 지금까지 누가 증명하려고 했겠습니까? 왜냐하면 브람만 속에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전혀 토대가 없는 것입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파도들이 바다에 존재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 자아감은 어째서 그 원인이 없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이제 당신은 진리를 바르게 이해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실상 '세상'이나 '자아감'이란 단어에 해당하는 실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공간과 전혀 다르지 않는 텅 빔이나 거리의 개념이 존재하는 것과 꼭 같이, 이 현상계도 그 형상이 같든지 다르든지 간에 지고의 존재 즉 무한한 의식 속에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실재를 잘 이해하면, 그것이 지고의 참나(쉬바)임을 까달을 수 있습니다. 독양도 바르게 이해하면, 신의 감로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은 악이 되고 슬픔의 세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의식은 그것이 실현시키는 모든 것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이 의식이 그 자체를 형체를 가진 영혼으로서와 세상으로서 보는 것은 참나 안의 혼란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지고의 존재로 빛나는 것은 오직 그 지고의 참나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자아감에 관한 질문 자체는 부적절합니다. 실재하는 그러한 물질에 대해서만 그러한 질문이 적절하지, 그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물질에 대해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과 자아감은 지고의 참나와 관계없는 독립적인 존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존재할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에, 사실 존재하는 것은 지고의 참나뿐입니다. 다섯 원소들의 결합으로 이러한 환영을 일으킨 것은 브람만의 에너지(마야)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여전히 의식으로 남아 있으며, 그것은 의식에 의해 깨달아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양함도 다양함의 개념에 의해 자각될 수 있습니다. 무한한 것은 그 자체 내에서 무한성을 일으키고, 무한한 것은 무한성을 창조하며, 무한한 것은 무한성에서 태어나고, 무한성은 무한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의식은 의식으로서 빛을 냅니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금의 경우에, 그것은 어떤 시간과 어떤 장소에서 하나의 장신구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평화인 참나로부터는 어떤 것도 창조되지 않았고, 또 어떤 것도 참나로 되돌아간 적이 없습니다. 브람만은 그 자체 내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한 경험의 문제인 이 세상에 대한 창조의 씨앗이나 원인이 아닙니다. 이러한 경험과 별도로, 이 세상이나 자아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한한 의식만이 존재합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현자시여! 나는 신에게 어떤 세상이나 자아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 자아감은 어떻게 그것들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빛납니까?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순수하게 경험하는 의식으로서 시작도 끝도 없이 존재하는 것은 무한한 것입니다. 무한한 것만이 말하자면 그것의 몸체인 이 확대된 우주입니다. 지성이라고 하는 다른 물질도 없으며, 또한 바깥이나 공도 없습니다. 존재의 본질은, 그러므로 의식의 본질은, 순수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유동성이 물과 불가분의 관계로 존재하듯이, 의식과 무의식은 동시에 공존합니다. 이렇게 존재하는 것을 설명해 줄 이론적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은 있는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 안에서는 어떤 모순이나 분리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만약 무한한 의식이 다른 어떤 것의 원인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형언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브람만은 원인이나 씨앗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그 결과로 간주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을 브람만과 관련시키는 것과,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무한한 의식과 관련시키는 것은 부적절한 것입니다. 만일 세상이나 자아감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이들은 남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의도된 공허한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의식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파괴가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의식은 파괴와 창조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파괴가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의식의 속임수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의식만이 존재하는 것이지, 하나도 아니요, 다수도 아닌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논의는 그만 합시다.

이와 같이 물질적인 존재가 없다면, 생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도 없고, 자아감도 없습니다. 육신을 갖고 있든, 아니면 육신을 떠났든 간에, 마음의 조건화가 없는 평화와 고요함에 잘 자리 잡고 계십시오. 브람만의 실재를 깨닫게 되면, 걱정과 불안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쉬키드바자는 말했습니다.

거룩한 분이시여!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아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정말로 마음이라고 하는 실체는 지금도 없습니다. 지금가지 존재한 적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빛을 내며 마음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실제로 무한한 브람만인 의식입니다. 마음과 세상 그리고 기타 나머지 모든 것의 개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참된 본성을 모르는 무지 때문입니다. 이들마저도 실체가 없는 개념인데, '나'나 '너' 등이 어떻게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세상'과 같은 것은 없으며,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정말로 브람만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누구에 의해 알려질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현 세상의 순환 주기가 시작될 때에도, 이 세상은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내가 그것을 창조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요인이 하나도 없는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창조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브람만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름도 형상도 없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논리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창조가 가짜인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마음은 진실을 제한하는 그러한 개념들의 다발에 불과합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분할은 분할 가능성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한한 의식이 분할할 수 없을 때는 분할 가능성도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어떤 분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할하는 주체인 마음이 어떻게 실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브람만 안에서, 그리고 브람만에 의해서 자각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을 의례적으로 마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처럼 뻗어 나가는 것은 오직 무한한 의식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우주라고 부를까요? 이 무한한 의식의 이국면이나 차원에서 보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사소한 현상도 본질적으로 의식 그 자체의 반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마음도 없으며, 또한 세상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무지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세상'으로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창조는 진정으로 있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것 때문에 부정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으로서 보여지고 있는 진정한 실재는 시작이 없으며 창조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물질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에 관한 경전의 주장들과 자기 자신의 경험들은 무지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장과 경험의 타당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언제라도 피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초월적인 실재는 영원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비실재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제한하는 부속물인 마음이 가짜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분할할 수 없고, 제한할 수 없으며, 이름도 형상도 없는 무한한 의식인 것입니다. 창조와 소멸의 순환 주기를 가진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한한 형상들인 브람만이 자기를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한순간에 그 스스로를 이 우주로서 알게 하고, 또 그렇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브람만 자체인 것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없습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망상은 사라졌습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지혜를 얻었습니다. 나에게서 모든 의심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압니다. 환영의 바다를 건넜습니다. 나는 '나'라는 생각이 없이 순수한 지식으로서 평화롭습니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이 그러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나'나 '너'라는 것이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이 평화로운 상태에서, 매 순간 아무 의지 작용이 없는 적절한 행동들을 하십시오. 이 모든 것은 평화인 브람만뿐입니다. 그래서 '나'나 '세상'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말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 세상으로서 보았던 것을 브람만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 브람마는 단지 하나의 관념이나 개념에 불과합니다. '참나'나 '나'라는 것도 꼭 그것과 같습니다. 그것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느냐 아니면 잘못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해방이나 굴레가 각각 주어집니다. '내가 존재한다.'라는 개념은 굴레와 자기 파멸의 원인이 됩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깨달음은 자유와 순수성을 가져다줍니다. 굴레와 해방은 개념에 불과합니다. 이 개념들을 알고 있는 것은 유일하게 존재하는 무한한 의식뿐입니다. '내가 존재한다.'라는 개념은 모든 고통의 근원입니다. 그러한 느낌이 없을 때 완벽한 경지에 도달합니다. '나는 그 자아감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순수한 의식 속에 조용히 머물러 계십시오.

그러한 순수한 자각이 일어날 때, 모든 개념은 사라집니다. 완벽한 경지가 있습니다. 그 순수한 자각, 완벽한 경지나 신 안에서는 인과성도 없고, 또한 그 결과로서 생기는 창조나 대상들도 없습니다. 대상들이 없으면, 경험도 없으며, 거기에 수반되는 자아감도 없습니다. 자아감이 존재하지 않으면, 삼사라(탄생과 죽음의 순환 주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삼사라가 존재하지 않으면, 지고의 존재만이 남게 됩니다. 그 안에서 이 우주는 마치 조각되지 않은 돌 속에 조각 작품들이 존재하는 것과 꼭 같이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간섭이 없이, 그러므로 우주에 대한 개념도 없이 이 우주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비전을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파도'라는 단어가 그 의미를 상실하면 바다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창조'라는 단어가 무의미한 것으로 보여지면 브람만만이 존재합니다. 이 우주는 브람만입니다. 브람만만이 이 우주를 알고 있습니다. '우주'라는 단어의 의미가 사라지면, '우주'의 진정한 의미는 영원한 브람만으로 보입니다. '브람만'이란 단어를 탐구해 보면, 전부가 이해됩니다. 마찬가지로 '우주'라는 단어를 탐구해 보면, 브람만이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개념과 그 자각의 기초와 바탕을 이루고 있는 그 의식이 '브람만'이란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진리를 명확히 깨닫고, 지식과 그 대상의 이원성을 버릴 때, 말로 묘사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지고의 평화가 남게 됩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지고의 존재가 실재하고 이 세상도 실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지고의 존재가 원인이고 이 세상은 그 결과라고 가정합니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직 인과 관계가 있을 경우에만 결과를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과 관계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어떻게 결과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브람만과 이 우주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 관계도 없습니다.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브람만입니다. 씨앗조차 없을 때, 무엇이 어떻게 태어나겠습니까? 브람만이 이름도 형상도 없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어떠한 인과 관계(씨앗)도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런 고로 브람만은 인과 관계가 없는 비행위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결과도 없습니다.

당신은 오직 브람만입니다. 그리고 브람만만이 존재합니다. 그 브람만이 무지에 의해 이해될 때, 그것은 이 우주로서 경험됩니다. 말하자면 이 우주는 브람만의 몸입니다. 그 무한한 의식이 그 자체를 실제로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것으로 간주할 때, 그것을 자멸이나 자기 경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자멸이 마음인 것입니다. 그것의 본성 자체는 참나 지식을 파괴하는 것(숨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멸이 일시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세상의 한 순환 주기 동안 지속되는 마음으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적인 존재는 오직 올바른 지식이 시작되고, 모든 개념들이 없어질 때만 사라집니다. 개념적인 존재가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이 세상이 실재하는 독립된 실체로서가 아닌 말로서만 존재할 때, 어떻게 그 세상을 하나이 실재하는 존재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마치 신기루 속의 물과 같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진짜일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비실재가 실재처럼 보이는 혼랁된 상태를 마음이라고 합니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무지요, 마음입니다. 반면에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참나 짓기이요, 참나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물이 아니야.'라는 깨달음이 신기루를 신기루로서 깨닫게 해부는 것과 꼭 같이, '이것은 순수 의식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하는 움직이는 의식이야.'라는 깨달음이 마음의 소멸을 가져다줍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 자아감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한한 의식, 그 하나만이 존재합니다. 모든 개념들은 사라집니다. 마음으로서 일어났던 기만도 개념들이 사라질 때 사라집니다. 나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고, 다른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당신도, 이 모든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도 없으며, 감각들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만이 존재합니다. 즉, 순수 의식만이 존재합니다. 삼계의 어떤 것도 지금까지 태어나거나 죽은 적이 없습니다. 무한한 의식만이 존재합니다. 일원성이나 다양성도 없으며, 혼란이나 망상도 없습니다. 어떤 것도 소멸되지 않고, 어떤 것도 번성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욕망과 무욕으로 나타나는 에너지마저도)이 당신 자신의 참나입니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면에서 영적으로 깨어났기를 바라며, 또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신이시여! 정말로 당신의 은총으로 나는 지고의 상태를 보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나는 나의 이해력으로 그것을 알 수 없었습니까?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직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지고, 쾌락에 대한 모든 욕망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리고 감각이 또한 그 색깔이나 덮개를 벗어났을 때만 스승의 말씀이 올바르게 이해됩니다. 이전의 노력들이 허비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기울인 많은 노력들로 오늘의 결실이 있어, 몸 속의 불순물들도 떨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심리적인 조건화가 사라지고 불순물들이 제거되거나 정화되면, 구루의 말씀은 마치 화살이 연꽃 줄기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 자신의 가장 내면에 있는 존재의 핵심까지 바로 들어갑니다. 당신은 이제 그 순수한 상태에 도달했으며, 그러므로 당신은 내 이야기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고, 당신의 무지는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의 삿상(신성한 교제)을 통하여 당신의 까르마(행위와 그들의 잔류 인상)들은 소멸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당신은 무지 때문에 '나'와 '나의 것'이라는 그릇된 개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제 내 이야기의 빛을 받아서 당신의 가슴에서 마음이 사라졌으므로, 당신은 완전히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지는 오직 마음이 가슴 속에서 작용하는 한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은 깨달음과 해방을 얻었습니다. 슬픔과 노력과 모든 집착이 없는 그 무한한 의식에 자리를 잡고 계십시오.

쉬키드바자는 말했습니다.

신이시여! 해방에 있는 사람에게도 마음은 있습니까? 마음이 없다면, 그는 어떻게 여기에서 살아갑니까?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해방된 사람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마음이 무엇입니까? 재탄생을 가져다주는 강한 심리적인 조건화나 한계가 마음입니다. 그런데 해방된 현자들에게는 이것이 없습니다. 해방된 현자들은 조건화가 없는 마음, 재탄생을 일으키지 않는 그런 마음의 도움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마음이 아니라 순수한 빛(사뜨바)입니다. 해방된 사람들은 마음이 아닌 이 사뜨바에 자리를 잡고서 여기에서 살아갑니다. 무지하고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마음이 마음입니다. 반면에 깨달음을 얻은 마음이 사드바인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살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사뜨바에서 살아갑니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계속 말했습니다.

당신은 최고의 포기를 했기 때문에 사뜨바(조건화가 없는 절대적인 마음)의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나는 조건화가 있는 마음이 완전히 버려졌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순수하고 무한한 공간처럼 되었습니다. 당신은 완벽의 상태인 완전한 균형의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이것은 잔류물 하나 없이 모든 것이 버려지는 완전한 포기입니다.

금욕 생활을 통해서 사랑이 어떤 종류의 행복(슬픔의 파괴)을 얻을 수 있을까요? 최고의 영원한 행복은 오직 완전한 균형을 통해서만 얻어집니다. 천국에서 얻어지는 행복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요? 아직 참나 지식을 얻지 못한 사람은 어떤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약간의 만족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금이 없는 사람은 구리에라도 집착하는 법이지요.

오, 왕실의 현자시여! 전에 당신이 추달라의 도움을 받아들였더라면 쉽게 현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신이 왜 이 슬제없는 무의미한 금욕 생활에 빠져들어야 했습니까? 거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중간에는 그럴듯한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금욕 생활은 어떤 점에서 이러한 영적인 각성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제 지혜에 뿌리를 내리고 조용히 계십시오.

이 모든 실재와 심지어 비실재적인 개념들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무한한 의식 안에서입니다. 그리고 그 속으로 그것들은 사라집니다. 심지어 '이것은 해야 한다.' 혹은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생각들조차도 이 무한한 의식의 작은 물방울과 같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버리고 조건화가 없는 절대적인 것에 조용히 머물러 계십시오. 금욕 생활 등의 이 모든 것은 간접적인 방법들입니다. 왜 참나 지식이란 직접적인 방법을 채택하지 않습니까?

사뜨바로서 묘사되었던 것은 사뜨바 자체에 의해서 버려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사뜨바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나, 혹은 사뜨바에 대한 무집착에 의해서 버려져야 합니다. 오, 왕이시여! 삼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슬픔은 오로지 마음의 갈망 때문에 일어납니다. 만약 당신이 생각의 움직임과 정지, 둘 다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다루는 그 균형 상태에 자리를 잡고 있다면, 당신은 영원 속에 안주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무한한 의식만이 존재합니다. 순수한 의식인 그 브람만이 사뜨바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그것을 세상으로 봅니다. 그 무한한 의식 속에서, 움직임이 없는 정지는 물론 움직임(흔들림)도 단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무한한 의식의 전체는 그러한 생각이 없는 이 모든 것입니다. 그것의 실재는 말로 표현하기 불가능합니다.

바시튜나는 계속 말했다.

이렇게 말을 한 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왕이 숭배의 표시로 꽃을 바치려 하는 바로 그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꿈바(브람마나-추달라)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면서, 쉬키드바자는 모든 욕망과 갈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조건화가 없는 심리 상태에 확고히 자리를 잡은 채 깊은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쉬키드바자가 최소한의 정신젓인 조건화나 의식의 움직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동안, 추달라는 그녀의 변장을 버리고 왕궁으로 돌아가 다시 본래의 여성의 모습으로 국정을 수행했습니다. 사흘 뒤에 그녀는 다시 쉬키드바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아직도 그가 명상에 열중해 있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다시 그의 의식을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해야겠어. 그가 지금 몸을 버려야 할 이유가 없지. 그로 하여금 당분간 왕국을 통치하게 한 다음, 우리 둘이 동시에 몸을 버리면 될 거야. 분명히 그는 내가 말해 준 가르침을 잊지 않을 거야. 요가의 수련을 통해 그가 방심하지 않고 늘 깨어 있도록 해야겠어.'

그녀는 거듭해서 사자처럼 포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의 몸을 아래로 밀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참나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아, 그가 완전히 참나에 들어 있구나. 어떻게 하면 그가 몸을 의식하는 상태로 돌릴 수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왜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지? 차라리 그가 몸을 버린 상태 그대로 놔두고, 나도 지금 당장 이 몸을 버리면 되지.'라고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몸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다시 "내 몸을 버리기 전에 그의 몸 속 어딘가에 마음의 씨앗(바사나)이 남아 있는지 봐야겠다. 만약 남아 있다면, 그는 다시 깨어날 수 있고,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은 해방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어서 그가 궁극적인 해방에 이르렀다면, 나도 이 몸을 버리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그의 몸을 살펴보고, 개별성의 씨앗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음을 알았습니다.

라마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신이시여! 현자이 몸이 통나무처럼 누워 있을 때, 그에게 사뜨바(정화된 마음)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이지 않는 미묘한 그의 가슴속에는 육체 의식을 되살리는 사뜨바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씨앗 속에 잠재해 있는 꽃이나 열매와 같습니다. 마음에 생각의 움직임이 전혀 없고, 이원성이나 일원성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도 없으며, 의식이 산과 같이 아주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그런 현자의 경우에는 몸이 완벽한 균형의 상태에 있으며, 고통이나 쾌락의 징후도 보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 몸은 일어서거나 쓰러지지(살거나 죽지)도 않으며,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 몸이 마음처럼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은 오직 이원성이나 일원성에 대한 개념이 있을 때뿐입니다. 이 세상으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생각의 움직임입니다. 그 때문에 마음은 이와 같이 억제할 수 없는 쾌락, 노여움 그리고 망상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균형 속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으면, 그러한 혼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순수한 공간과 같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사뜨바가 완전한 균형 상태에 이르면, 우리는 어떤 육체적, 심리적인 결함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사뜨바를 버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 적당한 때가 되면 사라집니다. 마음도 없고, 심지어 몸 속에 사뜨바도 없으면, 열을 받아 녹아 없어지는 눈처럼 몸도 여러 원소들로 녹아 없어집니다. 쉬키드바자의 몸에도 마음(생각의 움직임)이 완전히 사라졌지만, 사뜨바의 흔적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몸은 이처럼 여러 원소들로 용해되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리고, 추달라는 '내가 편재하고 있는 순수한 지성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육체 의식을 일깨워 봐야겠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가 얼마 후에 깨어날 것이 분명해. 그러나 그때까지 내가 혼자 가만히 기다릴 필요가 뭐 있어?"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추달라는 그녀이 몸을 떠나 쉬키드바자의 순수한 마음(사뜨바)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그 순수한 마음을 흔들어 놓고는 재빨리 그녀의 몸으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즉시 자신의 몸을 젊은 고행자 꿈바의 몸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꿈바는 부드럽게 사마 베다의 찬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찬가를 들으면서 왕은 그의 육체 의식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꿈바를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왕은 기뻤습니다. 그는 꿈바(브람마나-추달라)에게 "오, 신이시여! 다행히 우리는 당신의 의식 속에서 다시 한 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단지 나에게 축복을 흠뻑 내려 주시기 위하여 여기로 오셨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나간 이후로, 내 마음(가슴)은 줄곧 당신과 함께 여기에 있었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욕망도 없으며, 단지 당신 곁에 있고 싶을 뿐입니다. 나에게는 이 세상에 친척도, 친구도, 믿을 만한 사람도, 당신과 같은 제자도 없습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비록 당신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 집착에서 벗어났지만, 당신이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하니, 난 최고로 축복받은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제발 여기 이 숲 속에서 나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잠시라도 지고의 상태에 안주해 있었는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은 '이것은 다르다.'든가 '이것은 불행이야.' 등과 같은 개념들을 버렸습니까? 쾌락에 대한 갈망도 사라졌습니까?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나는 삼사라(현상계)의 피안에 다다랐습니다. 나는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을 얻었습니다. 참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알려진 것도 없고, 알아야(몰라야) 할 것도 없으며, 성취한 것도 없고, 버릴 것도 버려야 할 것도 없으며, 실체도 없고, 타자도 없으며, 또한 사뜨바(순수한 마음)마저 없습니다. 무한한 공간처럼, 난느 아무 조건화가 없는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그곳에서 한 시간을 보낸 뒤에, 왕과 꿈바는 숲 속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그들은 8일 동안 자유롭게 떠돌아다녔습니다. 꿈바는 다른 숲으로 가자고 제안했고, 왕은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삶의 규칙들을 준수했고, 조상들과 신들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하여 적절한 종교 의식들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가슴속에서는 더 이상 '이건 우리의 집이야.'나 '이건 집이 아니야.'와 같은 그릇된 개념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호화로운 옷을 입고 자녔고, 때로는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백단향의 성유를 바르고 다니기도 했으며, 때로는 재를 바르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며칠 뒤에, 왕도 또한 꿈바와 같은 광채로 빛이 났습니다.

왕의 광채를 보고서, 꿈바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고귀하고 건장한 내 남편이 여기 있구나. 숲도 즐거워하네. 우리는 피로를 모르는 상태에 있지. 그러면 쾌락에 대한 욕망이 어떻게 가슴속에서 일어나지 않겠는가? 해방된 현자라면,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그에게 찾아오는 것이 있으면, 그 모든 것을 반가이 맞이하며 경험하지. 그런데 만약 그가 관습(엄격한 규칙)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어리석음(무지)의 원인이 되지. 두 사람이 꽃동산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고귀하고 건장한 남편을 보고 열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여성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진리를 아는 사람이나 참나 지식을 갖춘 현자라면, 애쓰지 않고 얻어지는 것을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게 무엇이 있을까? 나는 내 남편이 나와 함께 부부의 쾌락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겠어.' 이렇게 결심을 하고서, 꿈바는 쉬키드바자에게 "오늘은 내가 천국에 가서 나의 아버님을 만나 뵐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떠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면 오늘 저녁에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친구는 꽃을 주고받았습니다. 꿈바는 떠났습니다. 곧 추달라는 변장을 풀고, 왕궁으로 돌아가 왕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꿈바로 변장하여, 쉬키드바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꿈바의 얼굴 표정에 나타난 변화를 알아차리고, 왕은 "오, 신의 아들이여! 왜 당신은 그렇게 슬퍼 보입니까? 거룩한 분들은 어떠한 외부의 영향에도 그들의 균형을 끼뜨리지 않는 법인데요."라고 물었습니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록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육신이 살아 있는 한, 만약 그들이 그들의 신체 기관을 자연스럽게 작용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완고한 고집불통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참깨가 있는 한, 참기름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이 있는 한, 여러 상이한 기분들도 있는 법입니다. 육신이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그 상태에 반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검으로 공간을 자르는 꼴입니다. 요가의 균형은 마음을 위한 것이지, 활동 기관이나 그들의 상태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존속하는 한, 비록 지성과 감각은 균형 상태에 머물고 있다 하더라도, 활동 기관들은 그들의 고유 기능을 하도록 허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그 자연의 법칙에는 신들도 따르는 것입니다.

꿈바(브람마나-추달라)는 계속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이제 나에게 어떤 불행이 일어났는지 제발 들어 주십시오. 왜냐하면 친구에게 자신의 불행을 털어놓으면 마치 음산하고 어두운 구름이 비를 뿌림으로써 옅어지는 것처럼, 그 불행도 크게 개성되기 때문입니다. 물에다 명반 한 조각을 넣으면 물이 깨끗해지는 것처럼, 친구가 자신의 운명에 귀를 기울이면 마음 또한 깨끗하고 평화로워집니다.

난느 당신을 떠난 뒤, 천국에 가서 나의 임무들을 행했습니다. 저녁이 다가오자 나는 천국을 떠나 당신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도중에 나는 저녁 예배에 늦지 않게 급히 공간 속을 날아가는 두르바사 현자를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어두운 구름의 옷을 입고 번개로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애인을 급히 만나러 가는 여자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인사하며 재미삼아 그렇게 말했지요. 그런데 그는 나의 무례함에 격분한 나머지, "이러한 건방진 언행으로, 그대는 매일 밤마다 여자가 될 것이니라."라고 저주를 했습니다. 나는 매일 밤 여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만 해도 슬픕니다. 욕망에 쉽게 넘어가는 신의 아들들이 이와 같이 거룩한 현자들을 모욕하는 결과를 받는 것은 정말로 비극입니다. 그러나 왜 내가 슬퍼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이것은 나의 참나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신의 아들이여! 슬퍼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대로 놔두십시오. 왜냐하면 참나는 육신의 운명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할당되는 기쁨이나 슬픔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육신에 영향을 주는 것이지, 그 내면의 거주자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당신마저 슬픔에 굴복한다면, 하물며 무지한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혹은, 당신이 불행한 사건을 이야기하는 동안, 아마도 당신은 적합한 말과 표현을 단순히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갔고, 밤의 어둠이 서서히 땅을 내리덮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녁 예배를 올렸습니다. 곧 꿈바의 몸이 서서히 소름끼치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눈물을 참으며, 목이 멘 목소리로 쉬키드바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 보십시오. 내 몸이 녹아 땅 위로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어요. 내 가슴에서 유방이 솟아나고 있어요. 나의 골격 구조도 여자에게 어울리는 변화를 하고 있어요. 보십시오. 여자에게 적합한 옷과 장신구가 바로 몸에서 생겨나고 있어요. 오! 어떻게 하면 좋아요? 나의 수치심을 어떻게 숨기지요? 내가 정말로 여자가 되었으니까요."

쉬키드바자는 "거룩한 분이시여! 당신은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필연적인 것을 두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운명은 오로지 몸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지, 형체를 가진 영혼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꿈바도 또한 "당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나는 이제 어떤 슬픔도 느끼지 않습니다. 누가 감히 이 세상의 이치나 자연의 이치를 무시할 수 있겠어요?"라며 공감을 나타냈습니다.

이와 같이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은 침실로 가서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따라서 추달라는 낮에는 수행하는 젊은 남자로서, 그리고 밤에는 여자로서 그녀의 남편과 함께 살았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이렇게 며칠간을 사이좋게 지낸 뒤에, 꿈바는 쉬키드바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나의 부탁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나는 이제 얼마 동안 밤에는 여자로서 지냈습니다. 나는 밤에 여자의 역할을 다하고 싶습니다. 나는 훌륭한 남편의 아내로서 살아야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삼계에는 당신만큼 나에게 소중한 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과 결혼하여 당신과 부부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즐거운 것이며,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데 어떤 흠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욕망과 거절을 모두 버렸으며, 서로가 완전히 똑같은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욕망이나 혐오도 없이, 자연스러운 것을 하도록 합시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친구여! 나는 이런 것을 함에 있어 어떤 선이나 악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 현명한 분이시여!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을 하십시오. 마음이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참나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꿈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당신이 그렇게 느끼신다면, 바로 오늘이 가장 경사그러운 날입니다. 모든 천체들이 우리 결혼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 두 사람은 결혼식에 필요한 모든 품목들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신성한 의식에 앞서 신성한 물로 서로 몸을 씻었습니다. 그들은 조상과 신에게 숭배를 올렸습니다.

이 무렵, 밤이 찾아왔습니다. 꿈바는 다시 사랑스러운 여자로 몸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소중한 친구여! 이제 나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나의 이름은 마다니까입니다.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당신의 아내입니다." 그러자 쉬키드바자는 화환과 꽃과 보석으로 마다니까를 장식해 주었습니다. 왕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흠모하면서, "오, 마다니까여! 당신은 여신 락슈미처럼 빛이 납니다. 우리가 태양과 그림자처럼, 락슈미와 나라야나처럼, 쉬바와 빠르바띠처럼 함께 살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에게 행운의 축복을 내려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직접 신성한 불을 보살피면서, 엄격하게 경전의 지시들에 따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제단은 꽃이 피어 있는 덩굴식물과 보석들로 장식되었습니다. 제단의 네 모서리는 야자열매로 장식이 되었고, 강가의 성수가 가득 든 여러 항아리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앙에는 신성한 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 주위를 돌면서 그에 어울리는 신성한 찬가와 함께 규정된 봉헌물들을 거기에 바쳤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고 있는 사이에도 왕은 자주 마다니까의 손을 잡았으며, 이는 그가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 결혼식에서 그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다음 그들은 세 번 신성한 불 주위를 돌아 걸으면서, 라자 호마라는 것을 올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신부 방인 이행사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동굴로 물러갔습니다. 달은 서늘한 빛을 쏟아 붓고 있었습니다. 신부의 침대는 향기로운 꽃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이 침대로 올라가서 그들의 결혼식을 마무리지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해가 떠오르자, 마다니까는 다시 꿈바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들 부부는 낮에는 친구로서, 밤에는 남편과 아내로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밤 쉬키드바자가 잠든 사이, 꿈바는 몰래 침실을 빠져나와 궁중으로 가서 왕실의 임무를 보고, 다시 재빨리 왕의 침대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달 동안 그들은 마헨드라 산의 동굴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여러 숲 속을 떠돌며, 산허리를 전전해 다녔습니다. 얼마 동안 그들은 마이나까 산의 남쪽 사면에 있는, 빠리자따 숲으로 알려진 신들의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꾸루 지역과 꼬살라 지역도 떠돌아다녔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달을 즐겁게 지낸 뒤에, 추달라(꿈바로 변장한)는 '나는 왕의 앞에다 천국의 쾌락과 기쁨을 가져다 놓고 왕의 성숙함을 시험 해 봐야겠다. 만약 그가 그것들을 보고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다시는 쾌락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결심한 뒤에, 추달라는 그녀의 마력으로 쉬키드바자 왕의 바로 앞에다 신들의 왕인 인드라 신이 천인들과 함께 있는 환영을 만들어 왕이 보게 했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나타났음에도 왕은 전혀 동요되지 않고, 그들에게 마땅히 표해야 할 숭배를 올렸습니다. 그 다음 그는 인드라에게 "당신이 수고스럽게도 오늘 여기까지 찾아 주시다니,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게 무엇이 있는지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물었습니다.

인드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거룩한 분이시여!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당신의 현존에 이끌리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영광이 천국에서 칭송되는 것을 들어 왔습니다. 자! 천국으로 오십시오. 천인들은 그대의 위대함을 들어 왔기 때문에, 그들은 그대를 무척 보고 싶어 합니다. 완벽한 경지에 도달한 현자들과 꼭 같이, 공간을 가로질러 그대를 천국에 오게 해 줄 수 있는 이 천국의 표를 부디 받아 주십시오. 오, 현자여! 그대처럼 해방된 사람들은 청하지 않았는데도 찾아오는 행복을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대의 방문으로 천국을 정화시켜 주십시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인드라여! 나는 천국에 널리 퍼져 있는 조건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천국이 모든 곳에 있으며, 또한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욕망이 없기 때문에, 나는 어디에 있든지 행복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설명하는 한 장소에만 국한된 그런 종류의 천국에는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의 분부를 이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인드라는 "그러나 나는 해방된 현자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쾌락을 경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스비다. 쉬키드바자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인드라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쉬키드바자는 "나는 지금은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왕과 꿈바에게 축복을 내린 뒤에, 인드라와 그의 모든 수행원들은 사라졌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추달라는 그 마술의 환영을 거두어들인 뒤에,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다행히 왕은 쾌락의 유혹에도 끌리지 않는구나. 인드라가 그를 찾아와 천국으로 초대한 바로 그때도, 왕은 아무 영향을 받지 않은 채 공간처럼 순수하게 남아 있었지. 이제 나는 그가 애착과 혐오라는 두 가지 세력에 흔들리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에게 또 하나의 시험을 받아 보게 해야겠구나.'

바로 그날 밤, 추달라는 마술의 힘으로 즐거운 쾌락의 정원과 그 안에 특별히 아름다운 침대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쉬키드바자보다 신체적으로 더 매력적인 남자를 한 명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침대 위에서 그녀는 아주 진한 포옹을 하며, 그녀의 애인과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쉬키드바자는 그날 저녁의 기도를 끝마치고, 아내 마다니까를 찾았습니다. 얼마 동안 찾다가, 이윽고 그는 이 두 사람의 비밀 은신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사랑 놀이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를 휘감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두 임은 열렬한 키스로 서로 붙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서로에 대한 정렬적인 사랑으로 매우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지를 움직일 때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극도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그들 가슴의 희열이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가슴이 상대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위 환경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쉬키드바자는 이 모든 것을 보았지만 전혀 감동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돌아서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있다는 것이 두 사람에게 목격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제발 내가 그대들의 행복을 방해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에 마다니까는 그 정원에서 나와서, 자신의 행동에 수치심을 느끼면서 쉬키드바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왕은 "여보! 왜 이렇게 빨리 나오셨어요? 분명히, 모든 인간은 행복을 즐기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토록 조화를 이룬 두 사람을 이 세상에서 찾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이 때문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아주 대단히 좋아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꿈바와 나는 아주 좋은 친구이지만, 마다니까는 단지 두르바사가 내린 저주의 결과가 아니겠어요?"

마다니까는 다음과 같이 변호했습니다. "오, 신이시여! 그러한 것이 여자의 본성입니다. 그들은 정절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들은 남자보다 여덟 배나 정열적입니다. 그들은 약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 성욕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를 용서해 주시고, 화내지 마십시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에게 전혀 화내지 않아요. 그러나 지금부터 내가 당신을 나의 아내로서가 아닌 나의 좋은 친구로서 대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추달라는 왕의 그러한 태도에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론적으로 그가 성욕과 분노를 초월해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즉시 마다니까로서의 이전 모습을 버리고, 추달라로서의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쉬키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사랑스러운 부인이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떻게 여기로 오셨습니까? 여기에는 얼마나 오래 계셨습니까? 당신은 나의 아내와 너무 많이 닮으셨습니다.

추달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정말로, 내가 추달라입니다. 나는 당신의 영혼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꿈바와 다른 모습들로 변장했던 것입니다. 나는 또한 당신이 방금 보았던 정원 등을 갖춘 이 작은 환영의 세상을 직접 꾸며냈습니다. 당신이 어리석게 왕국을 버리고 금욕 생활을 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바로 그날부터, 나는 당신의 영적인 깨달음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꿈바의 형상을 취하면서 당신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당신이 꿈바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지각했던 그 형상들은 진짜가 아닙니다. 이제 당신은 완전히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바시슈타는 계속 말했다.

쉬키드바자는 깊은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면에서 그가 왕궁을 떠난 때부터 일어난 모든 일을 보았습니다. 그는 기뻤으며, 아내에 대한 애정도 크게 증가했습니다. 다시 육신의 의식으로 되돌아온 뒤에, 그는 설명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열정으로 추달라를  포옹했습니다. 그들의 가슴이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흐르는 가운데, 그들은 마치 초월의식 상태에 빠져 있기라도 하듯이 한동안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쉬키드바자는 추달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 넥타보다 더 달콤한 사랑스러운 아내의 애정이 얼마나 감미로운가! 당신은 나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불편과 고통을 감수했는가! 당신이 나를 이 무서운 무지의 바다에서 구원해 준 방법은 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는 칭찬할 만한 훌륭한 아내였던 위대한 여성들이 다수 있었지만, 그들도 당신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모든 미덕과 고귀한 자질에서 그들 모두를 능가합니다. 당신은 열심히 노력하여, 나의 깨달음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에 대한 보상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사랑하는 아내들은 이와 같이 자신의 남편들을 이 삼사라의 바다로부터 해방시키려고 애씁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그들은 심지어 경전이나 구루와 만뜨라까지도 해낼 수 없었던 것을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성취할 수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모든 것입니다. 말하자면, 친구이고, 오빠이며, 지지자이고, 하인이며, 구루이고, 동반자이며, 부와 행복이고, 경전과 거처(그릇)이며, 또한 노예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아내는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존경과 숭배를 받아야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추달라여! 당신은 정말로 이 세상에서 여성 중의 최고의 여성입니다. 자, 다시 나를 안아 주세요.

바시슈타는 말했다.

그렇게 말한 뒤, 쉬키드바자는 다시 사랑스럽고 열렬하게 추달라를 포옹했습니다.

추달라는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무의미한 고행을 하고 있는 것을 내가 보았을 때, 내 가슴은 대단히 아팠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 와서 당신을 일깨워 주려고 노력함으로써 나는 그 고통을 덜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정말로 나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거기에 대한 어떤 칭찬도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쉬키드바자는 대답했습니다.

지금부터 모든 아내들이 당신처럼 그들 남편의 영혼을 일깨워 줌으로써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실현하기를!

추달라는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에게서 여러 해 전에 당신을 괴롭혔던 하찮은 갈망들이나 생각들이나 느낌들을 볼 수 없습니다. 이제 당신의 본질은 무엇이며, 당신이 무엇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지금 당신이 보는 것은 무엇인지를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쉬키드바자는 대답했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나의 내면에 가져오게 한 그것에 조용히 머물러 있습니다. 나에게는 어떤 애착도 없습니다. 나는 분할할 수 없는 무한한 공간과 같습니다. 나는 평화입니다. 나는 비슈누나 쉬바 같은 신들조차 도달하기 어려운 그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나에게는 혼란과 망상이 없습니다. 나는 슬픔이나 기쁨도 경험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이 있다.', '다른 것이 있다.'라고 말할 수 없스빈다. 나는 모든 덮개들을 제거하고 내면의 행복을 즐기고 있습니다. 내 존재의 본질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입니다. 말로 옮기기는 어렵습니다. 여보! 당신은 나의 구루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사랑하는 여보! 나는 당신의 은총으로 이 삼사라의 바다를 건넜습니다. 나는 다시는 그릇된 생각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추달라는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쉬키드바자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어떤 금지 사항이나 지시 사항도 모릅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나는 그것이 적절하다고 알 것입니다. 당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추달라는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는 이제 해방된 사람들의 상태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욕망과 그 반대의 것은 모두 똑같습니다. 쁘라나의 단련이나 무한한 의식의 수행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과 중간과 끝에서 우리의 본질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한 가지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과 중간과 끝에서도 왕과 왕비입니다. 버려야 할 그 한 가지는 바로 망상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왕국으로 돌아가서, 그 왕국을 현명한 통치자에게 넘겨 줍시다.

쉬키드바자는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천국에 오라는 인드라의 초대를 수락해서는 안 됩니까?

추달라는 대답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나는 쾌락도 바라지 않고, 또한 왕국의 멋진 모험도 바라지 않스빈다. 나는 나의 본성 자체에 따라 내가 처하게 되는 모든 상황에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이 쾌락이다.'라는 생각이 '이것은 쾌락이 아니다.'라는 생각과 마주치면, 그들 둘은 모두 사라집니다. 나는 이보다 더 오래 존속하는 그 평화 속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그 다음 해방된 두 사람은 부부의 기쁨을 즐기면서 그날 밤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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