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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원점

제5장 신은 빛이며 나와 함께 있다-지식과 지혜

by Yuneelif 2023. 11. 17.

지식과 지혜

지식과 지혜를 동일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양자를 명확하게 구별하기란 힘든 일이다. 어디까지가 지식이고 어디서부터가 지혜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이 세상에서 배운 모든 지식 그 자체를 말한다. 지혜란 잠재의식층에 내재된 살아 있는 경험이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이 실생활에 어느 정도 응용이 가능한가. 아무리 해야 10의 지식 가운데 겨우 1 아니면 2 정도이다. 학자나 특수한 직업인이면 몰라도 사회에 진출한 지식인들의 응용범위는 그야말로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을 응용해서 실생활에 살리려고 하면 대개는 실패한다. 대학교수나 학자로 하여금 정치나 사업을 시켜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성공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 

생활의 터전은 살아 있는 생물과 마찬가지로 시시각각으로 변환하고 있다. 어제의 지식이 오늘은 소용없는 휴지가 되는 일이 적지 않다. 

오늘날의 의학은 100년 전에 비해서 엄청나게 진보하였다. 그러나 의학의 진보와 함께 새로운 질병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차례차례로 새로운 신종의 질병이 나타나서 의학이 거기 따라갈 수 없다는 것릉 수길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말한다. 의학의 진보가 있었기 때문에 미발견의 질병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원래 그런 질병이 있었는데 의학이 유치했기 때문에 그것을 몰랐던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한 지금까지의 의학은 치료의학이었을 뿐 예방의학은 미개척 분야이다. 그런 까닭에 환자가 그칠 날이 없다고도 말한다. 나는 의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의학의 분야에서 고칠 수 있는 질병도 많고 또한 그런 치료를 하는 것이 좋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다만 질병의 80% 정도는 물리적 치료만으로써는 낫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마음이 질병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종의 질병이 의학의 진보와 병행해서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사물을 만들어 내고 잇으며 시대와 함께 욕망의 방향도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의학은 물질과학으로서 물리적 치료에만 역점을 두어왔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물질과학으로서의 의학은 진보되어 왔지만 질병의 종류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늘어나고 있으므로 의학과 질병은 끊임없는 경쟁관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지식과 현실이다. 의학이라는 소위 과학 지식의 정점을 달리는 학문조차도 질병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때로는 속수무책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문이나 지식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우리의 생활의 터전은 지식이나 학문에 의해서 지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학문이나 지식의 필요성은 새삼 논할 필요도 없지만 요는 우리의 날마다의 경험이 지식과 학문에 앞서서 우리의 실생활을 살려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날마다의 경험에서 우러난 생활의 지혜가 우리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직업이었건, 혹은 가사였건 지식만으로는 계산해낼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란 다름 아닌 경험이다. 경험으로 습득한 것이 비로소 실생활에 도움이 되고 있다. 옛부터 '외우기보다는 숙달하라'라고 하는 속담이 있다. 어떠한 직업이건 제 몫을 하기까지에는 적어도 3년 내지 5년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 대학을 나와서 취직을 해도 금방은 힘이 되지 않는다.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다 지도자적 지위에 앉는 것도 아니다. 국민학교만으로도 대회사의 사장, 회장을 맡아 훌륭하게 임무 수행을 하고 잇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이런 것은 다 그 사람의 경험과 노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사회에서의 생활의 지혜가 그렇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도대체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란 산 경험의 축적이다. 축적된 것이 연에 따라, 때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사태에 따라 보통은 영감으로 나타나며, 사람에 따라서는 보다 구체적인 적절한 판단력으로 나타난다. 

지혜는 지식이나 두뇌의 활동으로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지혜는 마음에서 우러난다. 머리 속에 지식이 가득 차 있으면 지혜는 생겨나기 어렵다. 지식이 지혜의 용현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지혜의 보고는 잠재의식에 있다. 잠재의식이 열리면 지혜가 쏟아져 나온다.

불지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잠재의식의 밑바닥에서 샘물처럼 표면의식으로 흘러나오는 위대한 파장이요 빛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고 오관으로 판단이 되지 않는 문제가 해결되며 일상생활을 보다 풍부하게 해 준다. 

내가 하는 일은 전기가 전문이다. 전기에 관한 것이면 대개는 다 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한 지식은 제로이다. 경문 한 줄 배운 적이 없다. 배운 적이 없는 불경이 입을 열고 흘러나오며 그 뜻도 알아버린다. 

전화로써 보도 듣도 못한 사람으로부터 갑자기 상담을 받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는데도 수화기를 드는 그 순간에 그 사람의 전모를 알아버린다.

어째서 알게 되는 것일까. 인간의 잠재의식층에는 저마다 영혼의 형제가 있어서 소위 수호령으로서 그 사람을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의 탄생 이후의 인생을 전부 알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의 수호령으로부터 그 사람에 관한 전모를 듣고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것은 지식으로서는 절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금세의 지식 이전의 산 경험이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과거세가 있다. 전생윤회의 산 경험이 각자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 내재의식이 마음의 문이 열림으로써 지혜가 되어 흘러나오게 된다.

누누히 말한 바와 같이 마음의 문은 정도에 따른 생활을 함으로써 열린다. 그러면 과거세에 경험했던 것이 표면의식으로 흘러나와 인생의 안내자가 되어준다.

물론 사람의 과거세는 저마다 다르다. 정도를 걸어온 자도 있고 욕망의 일생을 보낸 자도 있다. 따라서 마음의 문이 열렸다고 해서 무엇이든지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에게 쌀을 생산하라고 한들 모심기 하나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과거세에 결험하지 못했던 것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것은 말할 수 있다. 일상생활이 정도에 따르고 있으며 또한 그런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에겐 수호령 이외에 지도령이 있어서 그 사람의 노력에 상응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과거세에 경험한 것이 없다고 하여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또 잠재의식이 열리는 것을 영도가 열린다고 말하는데 영도가 열리지 않는 사람이라도 지혜는 솟아난다. 그 사람의 일상생활이 정도를 좇고 있으면 그렇게 된다. 지혜 이외에 간지라는 것이 있다. 세상에는 간지를 부리는 자가 너무나 많아서 항상 불안과 혼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간지는 악령이나 동물령이 그 사람의 의식을 지배할 때 일어난다. 자기보존, 아욕,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는 상관 없다는 사고 방식이 강해지면 이런 것들이 빙의하게 된다. 악령이나 동물령이 빙의하면 질병에 걸리기 쉽고 의사에게 보여도 잘 낫지 않는다. 질병의 현상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남을 속이고 남의 물건을 횡령하며 남의 마음을 선동하고 뽐내기 좋아하며 냉정하여 피도 눈물도 없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 십인십색이듯이 악령이나 동물령도 여러 가지다.

불지라든가, 수호령, 지도령으로부터 얻어지는 지혜는 조화이다. 사람을 살리는 지혜이다. 사람을 골탕먹이는 간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알고 정도에 따른 인생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