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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1장 몸과 마음의 분리 현상-의문에의 탐구

by Yuneelif 2023. 1. 27.

정신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들의 육체는 언젠가는 멸망한다. 이 현상계에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다. 삼라만상 만물의 변해가는 모습도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

무력한 인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아에 집착하고 물질적인 욕망에 정신을 빼앗겨 일상 생활을 불평 불만으로 보내며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 채 일생을 허송하고 마는 인간이 그 얼마나 많은가.

나는 이러한 인간의 여러 가지 현상이 왜 그렇게 되며 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늘 의문으로 생각해 왔다.

신불의 존재, 사후의 세계, 불교, 기독교, 신흥 종교 등 구원을 외치는 목소리는 많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어느것 하나 나의 의문을 풀어주지 못했다.

인간의 고뇌, 그 원인과 결과, 그 모순에 대해서 나는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왔다. 그 끈질긴 탐구의 결과 나는 육체와 의식의 관계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으며 나아가 과학의 진리는 종교의 진리와 같으며 대자연의 만상 속에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길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투쟁과 파괴는 인간이 취할 길이 아니고 동물이 진화해 가는 한갖 과정에 지나지 않으며 신불의 아들인 인간은 자연계의 지배자로서 조화라는 근본 원칙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의문에의 탐구'는 30여 년에 이른다. 종교에 관해서는 거의 배운 바가 없고 다만 자연 과학 가운데서 신리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지금부터 나는 이 저술을 토해서 나의 신리의 원점이 된 체험담, 신리론, 조화에의 방법 그리고 제3자를 통한 신비의 체험담 등을 구체적으로 펴나가고자 한다.

이 저술 속에 인간의 고민에 대한 해결과 구원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의 신리론과 서로 관계가 깊은 '물질과 생명'이란 문제에 대해서 우선 간략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우주 공간에 체적과 질량을 가진 것을 물질이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물질의 모습이라고 해도 관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물질도 에너지 입자의 집합 농도에 따라 고체, 기체, 액체의 모습으로 다르게 존재한다.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우주 공간 역시 에너지 입자가 분산되어 있는 세계이다.

열, 빛의 작용에 의한 전기력·자기력·항성·혹성의 존재, 그 질량이나 중력의 차이는 천체의 운동에 따라서 달라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태양에너지와 지열에 의해서 존속하며 상호 운동을 통해서 춘하추동이란 계절을 형성한다. 동물, 식물은 이러한 대자연의 환경에 의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공간 세계는 3차원의 세계인데 물질은 물질로서의 에너지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

물질을 대별하면 무기와 유기로 분류되며 생물체는 유기질이 성장하는 세로 집단으로 형성된다. 그리고 세포집단으로 구성된 생물은 만생 만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안정되며 3차원의 세계에 어울리게 존재한다.

세포는 다시 핵분열을 일으키며 생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고, 하나의 몸뚱이를 구성하여 생명을 보존한다. 우리의 육체는 약 60조나 되는 세포로 성립되며 세포는 저마다 기능에 알맞는 여러 기관을 형성한다. 여러 기관으로 짜인 육체는 다시 대자연의 상호 관계 속에서 보존된다.

이와 같은 세포 집단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는 육체를 곰곰이 살펴볼 때 '그렇다면 이 물질의 지배자는 누구이며,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물질과 에너지의 공존불이의 모습이 물질적으로 실증되고 있는 이상 육체의 성립도 모두 물질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동시에 육체의 지배자인 의식, 즉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도 물질 에너지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서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든지 이러한 실증을 추궁함으로써 의식의 세계를 차원이 다른 세계로 정의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3차원의 물질과 4차원 이상의 의식의 병합으로 인간은 성립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왜냐하면 육체 물질이 절대적이라고 한다면 수면 중에는 기억기능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뇌세포는 만능의 기억 장치가 아니라 오관의 통신·수신·지령의 기관에 지나지 않으며 의식·영혼이야말로 이러한 기능을 조정하는 지배자이며 영생 불멸의 진성의 자신이라는 사실에 눈뜨지 않을 수 없다.

의식이 육체를 지배하며 그 의지로 육체가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이 의식의 중심을 '마음'이라고 부른다.

물질 에너지의 차원보다 더 높은 의식의 세계에 존재하며 대우주체의 지배자인 신불의 의식과 상통하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다.

마음은 상념의지의 발신소이다. 이 의지에 따라 물리적인 육체 행동이 나타난다. 슬플 때나 기쁠 때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실체에 다름 아니다.

육체적 노동에 의해서 피로해지는 현상은 육체 에너지의 소모에 의한 것이지만 심적 에너지는 정신적인 고민으로 소모되며 나아가 육체적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심적 피로는 그 고민을 조화함으로써 회복되는데, 근본적 해결이 없는 한 고통은 고질처럼 수시로 고개를 쳐든다.

그러한 고통의 원인은 대우주의 지배자인 신불의 의지를 거스른 인간 자신의 행위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불의 의지야말로 신리에 다름 아니며 인간의 마음 속에는 누구나 과거세에 배운 기억이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에겐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기보존·자아아욕을 부릴 때만의 일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언제나 선과 악이 동거하고 있으며 이기적인 자신 안의 악을 극복하는 생활이 인생의 수행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본능·감정·지성·이성·상념의 구역으로 갈라지며 그 상념에 따라 의지가 작용하는 구역으로 연락된다. 그리고 그 내부에는 저 세상과 이 세상을 전생윤회한 과거세의 상념·본능·감정·지성·이성·의지의 선천적 선악의 업도 담겨져 있고 금세에서 지은 후천적인 업도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음'이 신리에 맞는 생활을 함으로써 사람은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둥근 공 모양으로 마음의 각 영역이 잘 조화를 이룬 사람을 원만한 인격자라고 말하며 이러한 인격자의 의지는 언제나 유연하다.

따라서 마음이 무한대로 넓은 사람도 있고 특정한 사상 등에 의해서 스스로 한계를 그어 마음이 협소한 사람도 있다. 물질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만족할 줄 알고 물질 문명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기독교의 신리도 석가의 신리도 긴 역사의 과정에서 과거의 제자들, 학자들, 현재의 종교 지도자들의 지성·감정·의지 등에 의해서 왜곡되어 종파가 난립하는 현상을 빚고 있다.

신리를 상실한 종교는 이미 인간의 마음을 구제할 수 없다.

신리는 하나이며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현상계는 육체라는 배를 타고 건너는 수행장이기 때문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지만 차원이 다른 의식의 저 세상은 선과 악의 구역이 분리되어 각자의 마음의 조화도에 따라 단계가 정해진다. 그러한 준엄한 저승으로 우리의 마음은 이승의 조화도가 그대로 옮겨져 버린다. 인생항로의 고락은 우리의 마음이 스스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능이 그대로 노출되면 감정과 작용해서 이성과 지성을 잃게 한다.

감정만이 강해져도 마음의 조화는 무너진다.

자기보존의 감정이나, 오만한 지성, 자기보존의 본능은 마음에 구름을 끼게 하여 신불의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이성의 작용에 의한 반성이라는 상념과 행위가 마음의 구름을 벗기는 유일한 길이다. 마음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른 자이며 석가의 중도를 좇는 자이다.

만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보은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실현될 때 진심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여기에 도표를 싣는다. 다음 장을 읽기 전에 잘 보아두기 바란다. 이 상관 윤회의 관계가 신리론의 대들보가 되기 때문이다. 의문에의 탐구는 계속된다. 해답과 깨달음은 아무래도 저마다의 마음 속에 있다. 

ㅣ화내는 마음은 감정의 영역이 부풀고 이성의 부분이 비뚤어진다. 둥근 마음을 유지하는 길이 바로 팔정도이다. 연애를 하거나 사춘기가 되면 본능과 감정이 부풀고 지성과 이성이 짜부라져서 하트형이 된다. 이 땐 애인의 곰보도 보조개처럼 보인다.

 

내 안의 또 한 사람의 인간

인간, '이 불가사의한 것'에 대한 최초의 의문은 나 자신 안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1927년 아사마의 산바람이 세찬 한랭지 신슈사쿠 고원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가였으며 10남매 중 차남이었다.

북에 아사마, 남은 야쯔가다케, 동에 아라부내, 서쪽은 알프스 등 큰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섰고 다시 작은 산들에 감싸인 사쿠 고원의 계절은 언제나 아름답고 맑은 빛과 공기가 충만해 있었다.

아름답고 멋진 환경에 비해서 우리 집은 가난한 농가였기 때문에 열 남매를 키운 부모님의 고생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마음까지 가난해서는 안 된다.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고 가르쳐 주신 분이 어머니였다.

"자기 자신에겐 엄격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남에겐 자비를 베풀어라. 나쁜 마음을 먹지 말아라."

이렇게 일러주신 말씀은 지금도 내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물방울도 언젠가는 돌을 뚫는다."

끊임없는 노력의 소중함을 어머님은 늘 우리 자식들에게 일깨워 주셨다.

살생에 대해서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 한 치의 벌레에도 오푼의 혼이 있다" 하고 가르쳤고, 남의 험담을 하면 "남의 눈에 눈물 내면 내 눈엔 피눈물 난다"는 등 글을 모르시면서도 속담을 인용해서 마음의 위대함, 마음의 소중함을 몸소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는 묵묵히 일만 하시는 분이었다. "열 손가락은 다 소중한 것이다" 하시면서 오로지 우리 남매들의 교육에만 힘을 쏟았고 사치스러운 일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검소한 생활로 일관하시다가 75세로 일생을 마치셨다.

효도를 하고 싶을 때에는 이미 부모는 안 계셨다. 나는 나름대로 부모에게 효도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충분한 것이었을까 후회스럽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비롯하여 형제·친구·부부 등 모든 연생의 관계는 저마다 스스로의 원에 의해서 실재계에서 가장 정교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다. 신리를 깨달은 많은 나의 동지들에 의해서 이제 곧 이런 사실이 실증될 것이다.

가난한 농가의 환경을 택한 나의 경우도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인생에 대한 회의와 의문을 품기에 알맞은 가정 환경을 택해서 회의에 대한 해답의 궁극이 '신리'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사전에 계산해서 태어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아 알 수 있게 되었다.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가정에서도 나는 남매들 가운데 비교적 호강스런 성장기를 보냈다. 그런데 열 살되던 가을 어느날 갑자기 원인 불명의 병에 걸렸다. 생사의 문턱을 수십번 넘나들었다. 그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체험이었다. 9월 3일 밤 여덟 시 나의 심장은 멎고 의식불명이 돼버린 것이다. 그 때까지 나는 병이라곤 거의 앓지 않던 아이여서 부모님은 몹시 놀랬다.

그 날은 세 시간 정도 지나 정상적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그 날부터 매일 밤 여덟 시만 되면 내 심장은 멎어버리는 것이었다.

처음 한두 번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병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나는 내 병의 진행하는 과정을 똑똑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밤 여덟 시가 되면 딸꾹질이 나기 시작해서 나는 숨을 들이쉴 수가 없고 날숨만이 된다. 흡사 회전하고 있는 자동차의 엔진이 갑자기 기화관이 막혀 연료가 중단되어 엔진이 멎어버리는 것과 흡사한 상태가 된다. 불과 사오 초만에 심장은 완전히 정지하고 육체적 고통은 없어진다. 

부모와 형제들은 이대로 내가 죽을 것 같아 야단 법석을 떨며 의사를 부르고 의사는 서둘러 캠퍼 주사를 놓는다.

이러한 상태를 내 육체에서 빠져나온 '또 한 사람의 내'가 똑똑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을 나는 의식할 수 있게 됐다. 어머니는 나의 사체를 안고 내 귀에 입을 대고 내 이름을 외치고 있다. 둘러선 사람들도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죽은 내 육체를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어머니에게 걱정하시지 말라고 소리지르지만 도무지 통하지 않는다.

내 육체의 입술은 포도빛이 되고 얼굴은 창백해지며 수족은 수양버들처럼 힘없이 늘어진다. 나는 방 안의 사람들이 당황하여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무슨 약 냄새가 난다고 느끼는 순간 심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또 한사람의 나'는 어느새 나의 육체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15분에서 길게는 몇 시간 동안 계속되는 희귀한 병이었다. 의사도 불가사의한 일이라며 고개를 흔들었고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 일종의 분신현상은 정기적으로 나에게 일어났다. 육체에서 이탈했을 때의 '또 한 사람의 나'는 자유자재였다. 죽은 친구를 만나 보기도 했고 아름다운 꽃밭을 거닐기도 하는 등 믿을 수 없는 현상이 전개되어 가는 것이었다. 어떠한 틈새에서도 빠져나갈 수 있었으며 그 거동은 흡사 둔갑술을 부리는 듯했다.

의사들도 손을 들었다.부모님은 좋다는 치료법은 다 써 주셨다. 나리다산에 용한 침구사가 있다고 들으신 아버지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날마다 통원 치료를 시켜 주었다. 그 때문에 내 머리는 울퉁불퉁 얽어 지금도 그 자국이 남아있다. 신사를 천 군데 참배하면 낫는다고 들으신 아버지는 먼 타지방의 신사까지 찾아다니며 참배를 하셨다.

나도 지금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몸으로서 그 때 나를 위해서 걱정해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나의 불효가 얼마나 컸던가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