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Universial/깨달음 Enlighten

Dhyana=Zen=Seon

by Yuneelif 2018. 1. 30.
영어의 meditation이란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어가 지닌 드야나dhyana 만큼의 함축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meditation은 잘못된 언어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대가 meditation이라고 말하는 순간, 즉시로 '무엇에 관한?'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영어에서의 meditation이라는 단어의 뜻은 언제나 어떤 대상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인 드야나의 뜻에서는 그러한 대상이 없다. 이에 반하여 그것에는 절대적으로 대상이 없다. 모든 개념 중에서 전적으로 텅 비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드야나'이다. 그러므로, 붓다의 메세지가 중국에 이르렀을 때, '드야나'는 번역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뙈냐하면 중국에서도  동의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어는 세계의 다른 언어보다도 훨씬 풍부하다. 그래도 드야나에 해당하는 동의어가 없었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드야나와 같은 단어를 인도 이외에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실행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는 세계에 기여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드야나의 예술이다. 그리고 그 한가지 기여는 어떠한 것보다 훌륭한 것이었다. 모든 과학을 한 곳에 긁어 모아도 그것은 '드야나'라는 이 한마디 말보다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한 곳에 긁어 모아도 여전히 '드야나'라는 이 한마디가 무게가 더 나간다.
 
그것은 무한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의식의 통찰력이다. 개념이 없는 의식, 어떤 사념도, 욕망도 없는 의식, 잔물결 파도 하나 없는 바다. 아주 고요한 침묵, 하늘의 모든 별들을 비추는 대양, 그러한 것이 '드야나'이다.
 
드야나는 중국에서 번역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지만, 단어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쓰이게 될 때, 그 단어를 번역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 빛깔을 달리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자주 일어난다. 그대는 인디아India라는 단어를 알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신두Sindu라는 지금의 파키스탄을 거쳐 흐르는 거대한 강을 다르게 발음하는 방법이다. 페르시아 인들이 처음으로 그 강을 건널 때 그들은 그 강을 신두가 아닐 인두Indu로 발음하였다. 그것은 인두에서 인더스Indus가 되었고, 인더스로부터 인디아India가 되었다. 그리고는 몇몇 언어집단을 거치면서 그것은 신두가 아니라 힌두Hindu로 발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힌두Hindu, 힌두이즘Hinduism, 힌두스탄Hindustan 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신두라는 명칭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이제 힌두와 인디아라는 말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듯이 생각되어,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똑같은 것이 드야나에서도 일어났다. 붓다는 결코 산스크리트어로 말하지 않았다. 그것 또한 그의 독창성 중의 하나였다.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는 언제나 성직자들과 문화계층, 고도로 세련된 사람들의 언어였다. 붓다는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킨 선구자였다. 그는 평민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산스크리트어는 결코 서민들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사회 최고 계층의 언어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언어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 결코 서민들의 입에 오르지 못하도록 보호하여 왔다.
 
이러한 것은 전 세계를 걸쳐 모든 성직자들이 그들의 언어가 평민들에게 이해될 수 없도록 하는 책략이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의 언어가 평민들에게 이해되어 진다면, 그들은 폭로되어 정체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계속 말하는 것이 단순하고, 매우 평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치 무엇인가 뛰어나고,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대가 베다Veda를 그대 나라 말로 읽는다면, 그대는 매우 놀라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경전의 겨우 1%만 중요할 뿐 99%는 대단치 않은 잡동사니들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산스크리트로 읊는 것을 듣는다면, 그대는 매혹될 것이다. 그대는 쉽게 최면술에 걸려 들게 될 것이다.
 
코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아랍어로 듣는다면 거기에는 무엇인가 신비한 마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면 그대는 황당해질 것이다. 그것음 매우 평범해 보인다. 성직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경전이 평민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치있는 진가를 인정받고, 존경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이런한 점에서 또한 붓다는 혁명가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평민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붓다의 주위에 있던 평민들의 언어는 팔리어(Pali)였다. 팔리어로 드야나는 즈하나jhana였다. 좀더 중후하고 더욱 더 많이 애용되었다. 어느 단어가 더 많이 사용될 때, 그 단어는 거기에 원형을 갖기 시작하게 되면서 그 모서리를 잃게 된다. 그것은 마치 흐르는 강물 속의 돌과 같다. 서서히 둥글고 부드럽게 된다. 그것은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운 현상에 이르게 된다. 드야나는 거칠지만, 즈하나는 둥글고 부드러워 발음하기 쉽다.
 
그리하여 붓다의 메신저가 중국에 도착하였을 때, 즈하는 중국어의 츠안(ch'an; 禪)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단어가 중국에서 일본에 이르렀을 때에는 젠zen이 되었다. 그 뿌리는 드하나이다. 영어에서 또한 이에 버금가는 말이 없다. meditation이라는 말이 가장 가깝게 사용될 수는 있지만, 이는 매우 상당한 주의력을 기울이며 사용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메디테이션이란, 말 그 자체는 무엇에 관하여 명상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나, 드야나는 명상 속에서의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지, 무엇에 관한 명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비어있음emptiness이다. 그 어떤 대상도 관계하지 않는다. 순수한 무물상objectlessness,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 거울, 거울은 거울로써의 그 자신의 본성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대가 그러한 순수함과 무지에 이르게 될 때, 명상 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그대는 오직 명상 속에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doing)'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being)'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행위가 아니라 경지이다.


출처: http://webmail.oshokorea.co.kr/osho_talk/623